[문화의 향기] 유영국의 그림을 다시 만난 시간
하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았던 1970년대 우리들의 청춘 시절, 참 재미없던 세상에서 재미를 붙인 일이 책을 읽는 일과 그림을 보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에 온통 영혼과 시간을 빠뜨리고 있는 요즘 청춘들보다 재미는 좀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정말 나쁘지 않았다.

시간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시간만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낙원동이던 우리 집에서 숙명여고까지 가려면 매일 인사동을 거쳐야 했다. 그 시절엔 인사동에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굳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윈도에 걸린 그림만 보고 지나가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기억나는 그림이 밝고 화려한 색감의 유영국의 그림이었다. 그 화려하고 밝은 색감 때문만이 아니라 꼭꼭 닫혀 있던 마음을 한 번에 열어주는 그 그림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40년이 지난 며칠 전 다시 찾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비 오는 수요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영국 전’을 보러 갔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한 친구와 함께 본 그 그림들은 내게 아련한 옛날을 일깨웠다. 화가 유영국의 그림들은 1970년대 우리들의 우울한 청춘 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한 줄기 환한 햇살의 기억으로 남는다. 필자가 대학 4학년 때인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이어 다음해 현대화랑에서 열린 전시에서 본 그 새롭고 강렬한 그림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의 유통기간이 점점 짧아져서 이제 사람들은 동시대 미술이나 문학 외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떠올라 씁쓸했다. 하지만 유영국의 그림을 오랜만에 보면서 나는 40년 전으로 돌아가 갑자기 마음이 탁 트이는 해방의 기분을 다시 맛보았다. 1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앞서간 새로움에 새삼 신기했다.

유영국은 1916년 경북 울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930년대 도쿄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도쿄의 가장 전위적 미술이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했다는 점에서 초기 구상회화를 남긴 다른 추상 화가들과 분리된다. 그는 날 때부터 타고난 추상 화가이다. 도쿄 시절엔 그림으로 생업을 삼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업으로 사진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번에 처음 보는 그의 현대적인 사진 작업들과 기하학적 콜라주 작품들은 지금 봐도 너무 새로워서 놀람을 금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는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뛰어난 모더니스트의 감각으로 어릴 적에 보고 자란 산골 풍경을 아주 현대적인 추상화로 변신시킨 화가다.

1960~1970년대 유영국은 미술 대학생들에게 신화적 존재였다. 그림이 돈이 되지 않던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간 사람들은 필자가 보기엔 다 신을 닮은 존재들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작품에 몰두하며 400여점의 빛나는 추상화를 남긴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저 그림 그리기로 삶의 위안을 삼은 관조의 생을 살았다. 화려한 색채의 그림 위에 그어진 가는 선들은 마치 산과 나무들의 풍경에 떨어지는 한 줄기 햇살을 연상시킨다. 60세 이후에는 심장박동기계를 달고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고에 시달리며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그림은 살아가는 즐거움이었으며 그림의지는 생명의지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병과 함께하며 아름다운 삶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옮긴 찬란한 선과 색채의 세계를 보며 엉뚱하게도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빛 때문이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햇빛 좋은 날에 가서 그림을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황주리 < 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