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씨가 어제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갑작스럽게 불출마로 돌아선 진짜 속내가 궁금하지만, 그가 밝힌 몇 가지 이유만 해도 타당성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정치권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다는 점,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 뉴스로 상처만 남았다는 고백 등이 그런 것이다. 우리 정치권이 그런 곳이다. 그 자신이나 캠프라는 무수한 참모진은 그런 현실도 모른 채 대선에 나섰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본격적인 선거레이스가 시작도 되기 전에 물러난 반 전 총장의 퇴진을 퇴행적 한국 정치의 낡은 풍토와 연계해서만 볼 수도 없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정책이나 정견은 더더욱 보여주지 못했다. ‘진보적 보수’라는 모호하고, 심지어 기회주의적인 기치부터 그러했다. 확고한 철학도, 이념도, 정견도 보여주지 못해 ‘반반(半半)화법’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유권자에게 철학과 가치를 파는 일련의 이념 유통업이다. 선거가 그런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반 전 총장의 이중적인 정치 언어나 행보가 설자리를 잃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다. 중도 포기도 예견됐던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경력이나 사전 지지율만 바라본 채 무작정 ‘반기문 영입전’에 열을 올리던 몇몇 정파도 함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음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맞는 후보자를 키워내거나 그런 적임자를 적극 영입하지 못한 채 ‘반기문 마케팅’이나 모색해온 자칭 보수 정당들의 한계도 빤히 들여다 보인다.

지금 한국의 정당은 국회로 진출한 곳만 다섯 개에 달하지만 정치 이념과 철학은 뒤죽박죽이다.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은 아예 없다. 선택의 폭이 별로 없는 유권자들의 정치 불신과 정치적 냉소, 심지어 정치적 허무주의가 갈수록 팽배해지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모두가 정치한다는 이들이 원칙과 철학을 무시하고 정체성을 도외시한 결과다. 반씨의 중도 포기가 참으로 허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