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제도의 정비
20여년 전 미국 연수 중에 있던 일이다. 논문 작성 자료를 급히 챙길 일이 있어 새벽 4시께 대학 연구실에 갔다. 저렴한 대학 외곽주차장 정기권을 발급받았지만, 그때는 한밤중이고 잠시 있을 예정이어서 대학 연구실 바로 앞에 있는 텅 빈 주차장에 ‘괜찮겠지’ 하고 주차를 했다. 그런데 복사를 마치고 30분 뒤 나와 보니 주차위반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한밤중 그 짧은 시간에도 법은 엄격하게 집행되고 있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교통법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아직 운영이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불법주차가 많고 최고속도 제한은 무시된다. 출퇴근 시간에 교통정리하는 사람이 없다면 교차로는 각 방향 차량들이 뒤엉켜 마비되기 쉽다. 법규를 위반해도 제재를 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 단속도 일관성이나 형평성 있게 이뤄지지 않아 단속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불만을 터뜨린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해서 법규를 잘 안 지키고, 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준법정신이 투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이라도 일단 미국에 가면 그 나라 법에 따라 우리에겐 생소한 정지선 앞 일단정지까지 잘 지킨다. 결국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법을 무시해도 그로 인한 불이익이 작거나 운 좋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할 유혹을 받는다. 반면 미국에서는 법을 위반하면 예외 없이 엄격한 제재가 가해지므로 외국인 방문자라도 법을 잘 지키게 된다.

법 만능주의와 엄격한 법 집행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제도의 운영은 규정을 현실에 맞게 간소화하고, 있는 규정은 확실히 집행하며, 규정의 변경을 최소화하는 것이 해법이다. 명분에 밀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을 양산하고, 위반자 중 일부만 간헐적으로 단속하는 것은 법 경시를 조장하고 저항을 불러올 뿐이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과 의사 결정을 양심에 따라 옳은 방향으로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선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에겐 사랑이나 양심을 따르는 자유보다 기적과 신비와 권위 등의 제도에 의한 복종이 더 편한지도 모른다. 국민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제도 정비는 필요하다.

이태종 < 서울서부지방법원장 kasil6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