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뒤집어 읽는 '브렉시트 드라마'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러시아 땅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그곳에서 반경 16㎞ 이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지금의 독일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고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쓴 고트프리트 슈트라스부르크(1200년대 초반 출생)는 프랑스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글도 그곳에서 썼다.

아차, 몇 군데 잘못 쓴 대목이 있다. 러시아 땅, 프랑스 도시…는 지금 기준일 뿐이다. 그들이 살았던 당시에는 엄연한 독일 땅(또는 공동 거주지)이었다. 칼리닌그라드는 1254년 독일 십자군 튜턴 기사단이 일군 이래 1945년 소련(지금의 러시아)이 몰수하기 전까지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였다. 프라하는 1348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 황제가 최초의 독일어대학을 세운 도시다. 1300년께부터 독일인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해 집단 거주지역을 형성하고, 프라하의 학문·문화 생활을 주도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체코 서부 주데텐란트는 300만명의 독일인들이 모여 살던, 사실상의 독일 땅이었다. 이들은 독일 패전의 죗값으로 고향에서 추방당한 채 전혀 낯선 동독이나 서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주거니 받거니 해 온 알자스로렌 지방의 중심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1944년 11월 프랑스가 넘겨받기 전까지 독일 도시 슈트라스부르크였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 1000년 가까이 유럽대륙을 사실상 지배했다. 10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중심부를 지배한 ‘천년제국’ 신성로마제국과 동유럽까지 거머쥐었던 프로이센의 후예 독일은 주변 국가들에 ‘트라우마’ 대상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들은 1차 세계대전에 이어 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켜 유럽대륙에 전화(戰禍)를 안긴 독일을 무참한 영토 축소로 징벌했다.

전쟁으로 점철돼 온 유럽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동맹 결성에 나선 건 ‘통합만이 유럽을 지긋지긋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염원에서였다. 1946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유럽합중국’ 창설을 주창한 것도 그래서였다. 주요국들은 발 빠르게 1949년 유럽이사회를 설립했고, 8년 뒤 유럽연합(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창설했다.

영국은 그러나 유럽 통합작업에 가장 미적지근하게 응했다. EEC에도 뒤늦게 가입했고, EU 출범 이후에도 유로화 도입을 거부했다. 자유로운 통행을 약속한 솅겐조약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지난주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를 결의했다지만 지금까지도 EU의 준(準)회원국에 가까웠다.

그럴 만도 했다. 영국은 유럽역사에서 한 번도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는 ‘변방의 섬나라’였다. 대신 세계를 무대로 변방의 설움을 씻어냈다. 해양국가의 이점을 살려 해외 식민지 개척에 주력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 등을 집어삼키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뤘다. 역시 유럽의 변방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대륙과 앙골라 모잠비크 마카오 동티모르 등에 거대한 식민네트워크를 구축한 반면, 유럽대륙의 패자(覇者)였던 독일이 단 한 뼘의 해외 식민지도 갖지 못한 건 아이러니다.

대륙과 거리를 둔 덕분에 영화(榮華)를 누렸던 영국이다. 독일이 사실상 주도하는 EU에 심드렁했던 터에 ‘공동체 유지’를 이유로 각종 규제 족쇄까지 조여져 왔다. 결별을 선택할 이유는 충분했다.

19세기 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끝에 망국(亡國)의 비참을 겪어야 했던 한국의 과거가 떠오른다. 냉철하게 나라 안팎의 상황을 읽고 국운(國運)을 열어 나갈 지도자 집단을 갖추고 있는지, 그런 인물들을 분별력 있게 골라내고 힘을 받쳐 줄 국가 지력(知力)이 있는 나라인지 짚어 보게 된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