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통치자의 사진에 투영된 권력·외교·역사
19세기 말, 동서양 3국의 통치자가 남긴 사진을 보자. 사진을 가장 먼저 찍은 이는 검소한 의상으로 소박한 분위기를 냈다. 한 사람은 서양식 가구가 있는 궁궐을 배경으로 전통복장 차림을 했고, 다른 이는 서양식 군대 제복을 입고 칼을 짚고 있다. 각 사진의 주인공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1852~1919·사진), 일본의 메이지 왕(1852~1912)이다. 각 사진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사학자인 권행가 덕성여대 연구교수는 《이미지와 권력》에서 “통치자의 사진은 당시 각국의 사회 분위기와 외교적 상황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진이 초상화와 다른 점은 대내외에 배포하기 쉽다는 것”이라며 “이 때문에 사진은 근대 사회에서 통치자의 이미지를 만들고, 국민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책마을] 통치자의 사진에 투영된 권력·외교·역사
저자는 통치자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단이 초상화에서 사진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사진 기술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비단에 그린 초상화로 왕의 모습을 남겼다. 초상화는 왕의 재위 동안 규장각에 봉안됐고, 왕이 승하하면 진전(조선 왕들의 초상화를 모신 창덕궁 전각)에 보관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사진은 달랐다. 19세기 말부터 사진은 왕실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널리 활용됐다. 그 예가 대한제국과 영국, 일본 통치자의 사진이다. 1860년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사진을 저렴한 명함판으로 제작해 판매하도록 했다. 명함판 사진에서 왕관과 보석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단정한 중산층 가정의 어머니처럼 꾸민 여왕이 서 있다. 과거 절대왕정과 거리를 두면서, 건실한 근대국가의 지도층 이미지로 국민과 친근감을 쌓으려는 시도다. 사진은 당시 매년 300만~400만장이 팔릴 정도로 인기였다.

메이지 왕은 1873년 사진에서 단발에 서구식 제복을 입었다. 인물이 크고 위엄있게 보이도록 사진 구도를 가깝게 잡았다. 사진은 한정판으로 찍어 주로 서양인들에게 배포했고 일반 대중은 함부로 가질 수 없게 했다. 밖으로는 아시아의 맹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안으로는 국민에게 국왕 일가의 신성성을 부각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걸쳐 찍힌 고종과 순종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왕실이 보여주는 이미지로 당대 역사 상황을 알 수 있다. 1984년 미국인 사진가 로웰이 찍은 사진이 그 예다. 고종은 황룡포를 입고 서양식 카펫과 탁자, 커다란 향로와 함께 찍었다. 개화 중인 조선이 서양 열강들과 교류 중임을 보여준다.

이후 시간에 따라 사진 속 고종의 이미지는 크게 바뀐다.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1899년에는 견장이 달린 서양식 제복을 입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사진에는 고종 뒤에 일본식 자수병풍이 놓여 있다.

순종 때는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 사진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통치자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권한이 일본에 이관된 것은 정치적 권력이 일본에 넘어갔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배포물에 찍힌 고종과 순종의 사진은 함께 실린 일본 왕 사진 아래 작게 들어갔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