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이 벌인 '핏빛 난장'…군무·음악도 압권
대나무숲 우거진 어전 뒤뜰. 연산군이 대왕굿을 벌인다. 스스로 왕무당이 돼 대숲에서 뽑아온 푸른 대를 들고 귀신을 불러낸다. 장녹수의 몸을 빌려 현신한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 이승에 맺힌 한을 격하게 풀어낸다. 광분한 연산은 윤씨와 궁중 암투를 벌인 정귀인, 엄귀인을 철퇴로 때려죽인다. 할머니 인수대비 앞에서도 철퇴를 휘두르며 고함치는 연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인수대비는 기함을 하고 쓰러진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사진)의 1막 5장. 작품을 쓰고 연출한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독특한 무대미학이 집약적으로 펼쳐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굿판의 형식으로 전통 연희적 요소들을 무대로 불러들인다. 몸짓과 군무, 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지며 예술성 높은 공감각적 이미지를 창출한다. 압권은 연산이 벌이는 ‘핏빛 난장’이 거세지자 핏빛 옷을 입고 있는 인수대비가 괴기한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며 괴물처럼 변하는 장면이다. 강렬한 심상과 함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관객에게 남기면서 전통 연희의 놀이적인 연극성을 풍부하게 전달한다.

20년 전 유인촌 이혜영 주연의 초연으로 이미 연극계에 전설로 기록된 ‘문제적 인간 연산’이 새로운 음악과 몸짓, 무대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 이윤택은 조선왕조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을 인간적인 면모에 맞춰 작가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한 대본만 놔두고 나머지는 싹 바꿨다. 무대와 의상에 현대적인 색채를 입혔고, 소리와 몸짓의 비중이 높아졌다.

‘스타일리스트’ 이윤택이 추구하는 미적 세계가 완성도 높게 구현되는 무대다. 그 중심에는 음악감독과 작창을 맡고 녹수를 연기하는 소리꾼 이자람이 있다. 음악과 소리로 인물의 심리와 극의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조율한다. 폐비 윤씨의 혼령과 녹수가 부르는 애절한 2중창, 이자람의 구음과 아쟁의 소리가 절묘하게 섞여 한이 울부짖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음악 등이 대표적이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 자연음으로 들려주는 이자람의 절창은 감동적이다. 연산을 맡은 백석광은 무용수 출신답게 몸짓 연기의 품격을 높인다.

하지만 연산과 녹수의 연기는 다소 아쉽다. 연산의 광기와 녹수의 독기를 뿜어내기엔 두 사람의 연기 공력이 부족해 보였다. 두 사람은 물론 열연하지만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조연급 베테랑 배우들을 뚫고 나올 존재감과 무대장악력을 보여주진 못한다. 오는 26일까지. 3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