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한국 경제는 아직도 '국가주의 시장경제'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에 접어들었다. 연간 잠재 성장률은 3~4%, 최근 몇 년간 실제성장률은 2% 전후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는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혁신을 저해하고, 소득·계층의 양극화를 가져오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을 안고 있다.

《한국형 시장경제체제》는 한국 경제의 특수성을 분석한 책이다. 11명의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 소득분배, 갈등과 신뢰, 역사적 특징 등 한국 경제에 대해 서로 다른 주제로 쓴 논문을 모았다. 저자들은 “한국 경제가 다시 순조로운 경제성장의 길을 회복하기 위해선 무언가 이미 제 나름의 유형으로 성립해 있다고 믿어지는 경제체제를 개선하고 선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책은 한국 경제를 ‘국가주의 시장경제’로 규정한다. 한국의 시장경제 역사는 길지 않다.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통제해왔다. 고도성장을 이뤄내며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업과 기업집단이 발전됐지만 이런 경향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성장 시대를 맞아 사회와 시장의 불균형이 심화하면서 정부 규제는 더 치밀한 생태계로 발전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에서 “한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특질이 규제를 선호하는 정부에만 책임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부 규제를 요청하는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낸 역사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책은 조선왕조의 토지와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에서 저신뢰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다. 조선시대 사회조직인 ‘동리(洞里)’와 ‘계(契)’는 상민에 대한 양반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근대화 이후에도 이런 신분질서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근대적 법제와 결합해 점점 대중화됐다. 1950~1960년대 한국 사회는 가족과 친족집단 이외의 조직이 희박한 가운데 고립된 개인이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중앙권력을 지향하는 ‘나선사회’였으며, 이런 특성이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이후 대기업들은 해외 기업과의 경쟁을 통해 중앙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한국 사회도 진정한 의미의 근대 사회로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료제로 대표되는 나선사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교수는 “정부의 과거 역할은 대기업 육성이었지만 이제는 옥죄는 것으로 역할을 바꿨다”며 “한국의 사회와 경제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주의”라고 말한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 산업·서비스연구부장은 각각의 논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에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중소기업은 선진국과 정반대의 경로를 걸었다. 정부 주도로 대기업이 먼저 생겨난 다음 여기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자동차 가전 반도체 통신장비 디지털TV 등 기술 수명이 짧은 분야에 진입해 기술혁신을 이뤘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 다각화와 토착화를 달성했다. ‘추격형 혁신체제’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기술 수명이 긴 분야에서 혁신을 추구하는 ‘선진국형 혁신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했다.

저자들은 “이런 움직임이 성공하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새로운 결합이 필요하다”며 “중소기업 간 수평적 네트워크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역혁신 클러스터도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