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연 진영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이 직접 제작한 학도병 기념패를 들고 6·25전쟁 당시 겪은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최 회장은 사진을 찍는 내내 ‘꼭 태극기가 함께 나오게 해달라’고 기자에게 당부했다. 홍선표 기자
최의연 진영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이 직접 제작한 학도병 기념패를 들고 6·25전쟁 당시 겪은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최 회장은 사진을 찍는 내내 ‘꼭 태극기가 함께 나오게 해달라’고 기자에게 당부했다. 홍선표 기자
“같이 전쟁터로 향했던 전우들 대부분이 비목(碑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내가 죽으면 전우들의 기록을 남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지난 4일 오후 경기 양주시 덕정동에 있는 최의연 진영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82)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현관문 옆에 걸린 ‘6·25참전 진영학도의용군동지회’라고 적힌 현판이 눈에 띄었다. 최 회장의 집 한쪽은 국방부와 역사학자들이 출간한 6·25전쟁 관련 서적들로 빼곡했다. 그는 “전쟁 초기 미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K군번의 카투사(KATUSA)들에 관한 기록을 30여년간 찾아다녔지만, 제대로 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K군번의 카투사’ 기록 어디에도 없어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최 회장은 1945년 광복 직후 남쪽으로 내려와 전북 전주에 터전을 잡았다. 전주상업중학교 3학년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그해 7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피란을 가는데 경남 진영역에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붓글씨로 쓴 방이 붙어 있었어요. 가족들을 두고 혼자 기차에서 내려 학도병 모집소를 찾아갔죠.”

당시 진영학도의용군 모집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 주도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인 학도병만 100여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50~60명은 부산 사상국민학교에 마련된 유엔군 훈련소로 보내져 열흘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9월엔 미 제25사단으로 배치됐다.

최 회장이 당시 받은 군번은 K1120450. 1950년 7월부터 미군이 징집한 한국군 4만3000명이 ‘K’로 시작되는 군번을 받고 전투원과 정보원으로 전장을 누볐다.

국군은 1950년 8~9월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전투 장면.
국군은 1950년 8~9월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전투 장면.
1950년 8~9월은 국군이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시기였다. 국군은 유엔군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방어선을 지켜냈다. 최 회장 역시 경남 함안과 의령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했다.

손규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쟁 초기 최 회장 같은 카투사들은 현지 사정에 어두운 미군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며 “특히 적 포로를 상대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해 미군이 효과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설명했다.

1950년 10월 국군 9보병사단(별칭 백마부대)이 창설되며 9사단 28연대로 소속을 옮긴 최 회장은 같은 해 12월 강원 인제군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인 일등병과 하사관 2명에 나까지 4명이 정찰을 하던 중 중공군과 마주쳤고, 그 때 오른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며 “근처 농가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이틀간 숨어 있다가 간신히 부대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진영학도의용군 사료 전쟁기념관 기증

제대 이후 28년간 공군 군무원으로 일한 최 회장이 학도병 동기들 기록을 찾아나선 때는 1983년이다. 매년 수차례 부산, 김해, 창녕에 내려가 옛 전우들의 소식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진영학도의용군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미 국방부와 주한미군사령부에도 카투사로 편입된 학도병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지 문의했지만 역시 제대로 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최 회장은 1993년부터 매년 11월 전쟁기념관과 9사단 내에 있는 절인 백마사를 찾아 홀로 전우들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30여년간 모아온 진영학도의용군 관련 사료 89점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전쟁기념관에 이름 없이 죽어간 카투사 무명용사의 추모비를 세우는 게 일생의 소망”이라며 “내가 죽더라도 그동안 내가 담아온 전우들의 기록만큼은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주=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