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경제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은 '간판보다 실력'입니다. 안전제일 직업관을 벗어던지고, 청년층이 잡프런티어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로의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경닷컴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전문 지식인과 맞춤형 전문대 교육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변성현 기자
/ 변성현 기자
[ 김봉구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이후 성대모사는 안 했어요. 아무리 엄숙히 해도 기본적으로 성대모사는 ‘희화화’거든요. 하지만 앞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젠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재현하는 게 값어치 있지 않나 싶어요.”

16년차 방송인 배칠수(42·사진)는 자기 색깔이 분명했다. 성대모사를 업(業)으로 삼고 있지만 물러설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안다. ‘남의 목소리로 사는 사람’이란 선입견에도 “핀트가 안 맞는 얘기다. 내 콩트에 성대모사를 활용하는 것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의 본명은 이형민. 1999년 수퍼보이스탤런트 선발대회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후 배칠수란 예명으로 살았다. 물론 배철수의 성대모사만 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풍자 코미디로 익힌 노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의 목소리가 장기다. ‘성대모사의 달인’답게 주활동 무대는 라디오다. 하루 종일 스케줄을 소화한 뒤 짬을 낸 그를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형민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돌 무렵 어머니를, 고교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들 손에 자랐다. 우유 배달부터 시작해 학생 때도 일을 쉬지 않았다. 고교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지만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곧 그만뒀다. 빨리 그 뭔가를 배워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전문대(인천재능대 레저스포츠과)였다.

예의 뛰어난 입담으로 인생 얘기를 들어보니 ‘전문대 모델’에 맞는 인물이란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당시엔 사회체육과였는데, 경인지역에서 유일한 학과였다” 며 “88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엘리트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바뀌는 시기여서 전망이 있을 것 같아 택했다”고 털어놨다.

어려서부터 남의 목소리를 곧잘 흉내 낸 그에게 ‘방송 쪽으로 나가보라’는 구체적 조언을 해준 사람도 대학시절 지도교수였다. 보디빌딩을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의 끼를 알아봤다. 배칠수는 “대학 2년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스스로 발전할 수 있었던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 성대모사의 달인이다.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은 것 같다. 예전엔 동네에 집 나가서 몇 년씩 안 돌아오는 가장들이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척, 아버지가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해 가족들을 놀래키는 짓궂은 장난도 치셨던 기억이 난다. (웃음) 아버지를 닮아선지 나도 어릴 때부터 그런 장난을 많이 쳤다. 잔재주가 있었고 주변 반응도 좋았다.”

-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하긴 쉽지 않았을 듯한데.

“대학시절 MT에서 응원단장 역할을 했다. 보디빌딩 선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넌 몸집이 크지만 언변이나 재주가 언밸런스하면서도 매력 있다. 방송 쪽으로 나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해 준 적이 있다. 당시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방송 일을 하다 보니 그 기억이 많이 났다. 지금도 지도교수였던 임춘한 학과장님과 자주 연락한다.”

- 남의 목소리로 산다는 것, 어떤 느낌인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해의 코드가 잘못됐다고 할까. 남의 목소리로 인생을 사는 것과는 다르다. 성대모사는 내가 하는 콩트에 부속처럼 쓰일 뿐이다. ‘배칠수’지만 사실 배철수 성대모사도 그렇게까지 잘 안 하는 것 같다. (웃음)”

- 확실히 이미테이션 연예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음, 성대모사를 전혀 안 쓰는 경우도 있다. 많이 하는 성대모사는 7년째 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도. 물론 노 전 대통령은 돌아가신 이후엔 안한다. 아무리 엄숙하게 해도 성대모사는 희화화니까.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도 나름의 값어치 있는 일 아닌가.”
/ 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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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본명을 알았다. 이형민의 삶은 어땠는지.

“고교 때 보디빌딩을 했다. 대학은 아예 생각도 안했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스테인드글라스 생산하는 공장에 다녔다. 나름대로 미술에 소질 있는 편이라 일은 곧잘 했다. 하지만 1년도 채우지 않고 그만뒀다. ‘전문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게 없으면 내가 사회에선 아무것도 아니구나, 한 개의 볼트나 너트도 안 되겠구나 싶었다.”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16년째 공장 다닌다는 김 부장님, 내가 16년 다녀도 저렇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답답하더라. 이건 아니다, 확실한 나만의 것이 있어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해 8월쯤 직장 그만두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입시학원에 다녔다. 사실 대학 갈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사회생활 1년 정도 하면서 전문대라도 나왔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크다는 걸 느꼈다.”

- 4년제 대학을 갈 생각도 했을 것 같은데.

“고교 때 공부와 담 쌓기도 했고. (웃음) 무엇보다 형편상 얼른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4년제대에 갈 만한 시간과 여력이 없었다. 빨리 취업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내 경우엔 전문대가 딱이었다.”

- 레저스포츠과에 진학한 건 고교 때 운동을 해서인가.

“나름 생각이 있었다. 그때가 1990년 대 초였다. 올림픽을 거치면 엘리트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변화할 거라고 했다. 당시 학과명은 사회체육과였는데, 전망이 있을 거라 봤다. 희소성도 있었다. 경인지역에선 인천재능대에만 그 학과가 있었다. 전문대 쪽에선 유명했다. 괜찮은 4년제대 갈 만한 친구들도 학과 특성 때문에 올 정도였으니까.”

- 어렵게 들어간 셈인데 대학생활은 어땠나.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모티브를 준 것 같다. 물론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나 프로 골퍼가 돼 지금까지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커리큘럼의 도움을 받지만, 마치 고교 선생님 같이 학생들과 함께했던 교수님들의 열정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학과 3기였는데 최근 커리큘럼을 보면 너무 좋다. 다시 대학에 다니고 싶을 정도다.”

- 전문대에 대한 기억이 정말 좋은 것 같다.

“전문대가 특화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학교에 다닐 당시 인천재능대엔 전국에서 유일하게 표면처리과가 있었다. 도금 등 관련 분야에 100% 취업했다. 내가 졸업한 사회체육과도 지역에선 유일했고. 2년 안에 그런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게 전문대가 갖는 장점이자 효율성이라고 생각한다.”

- “이기우 회장님 일이면 무조건 (인터뷰) 하겠다”고 했다. 무슨 인연인가.

“고졸로 교육부 차관까지 하셨으니 입지전적 인물 아닌가. 8년 전 모교 총장에 취임하실 때 내가 사회자를 맡은 적 있다. 좋게 봐주셨는지 이후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뭐랄까, 일반적인 어른의 행동양식과 다른 태도가 있다. 그 정도 연세에 성공하셨으면 ‘인생은 이런 거다’ 할 법 한데 그런 게 없다.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상의하고 칭찬해주는 어법이 인상적이었다. 훗날 내가 나이 들어 젊은 사람과 얘기한다면 벤치마킹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한 번 믿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하는 성격인 것 같다.

“평소 겸손엔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못난 사람은 겸손한 게 아니라 그냥 못난 거다. 잘나야 겸손할 수도 있는 거다. 이기우 회장님은 그런 겸손이 배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게 얘기가 들어오면 무조건 하게 된다. 다른 얘기이긴 한데, 인천 사람인 내가 대전·충청 연고의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 명예홍보대사를 맡은 것도 정민철 코치와의 막역한 사이 때문이다.”

- 방송인 배칠수의 앞으로의 계획은.

“16년째 방송 생활을 하고 있다. 우선 20년 채우는 것. 20년 정도 하면 적어도 능력 없어서 밀려났다는 소린 안 들을 것 같다. (웃음) 사실 꼭 오랫동안 방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이전에 헬스클럽도 4년 정도 운영했고… 방송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 좀 의외다. 가장 큰 관심사는 뭔가.

“다른 것 없다. 나는 어머니가 돌 무렵에, 아버지도 고교생 때 돌아가셔서 형제들 손에 자랐다. 그래서 내 아이들과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우리 가정의 행복이 제일 큰 관심사다. 방송 일도 그 목표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 나에게 전문대란…

내 인생의 황금기. 고교 때부터 거의 쉬지 않고 일해 왔다. 대학 2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교수님들을 종종 찾아뵙는다. 동기들과의 즐거운 시간, 너무 좋았던 수업까지 기억이 많이 남는다. 특히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전문적인 뭔가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내겐 가장 맞춤한 곳이었다.
[잡프런티어 시대, 전문대에 길을 묻다] '달인' 배칠수 "故노무현 대통령 성대모사 다시 하겠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 변성현 기자 byun8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