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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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A대리는 매년 ‘스승의 날’에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있어 보이는’ 선물을 골라 회사 직속상관 몇 명에게 보낸다.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적은 카드도 빼놓지 않는다. 사내에서 ‘아부쟁이’라는 놀림을 받고 일부 상사는 “받을 게 아닌 것 같다”며 선물을 거절하기도 하지만 A대리는 해마다 스승의 날을 챙긴다. 선물을 되돌려주는 상사도 기분만은 좋을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연말 인사철이다. 직장 선후배와 동료들에 대한 ‘칭찬’ 또는 ‘뒷담화’가 유독 많이 나도는 시기다. 지나친 아부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소문없이 상사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기술을 발휘하는 고수들도 있다. 다면평가가 확대되는 등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윗선에만 충성하고 부하 직원들을 홀대하다 낭패를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부는 아무나 하나”

“디테일을 챙기지 못하면 아부도 못하죠.”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박 과장은 지난해 새로 부임한 여성 임원 C씨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대형 로펌 출신인 C씨는 B사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사장의 눈에 들어 본부장급으로 영입됐다. 동종 업계 근무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임원급으로 스카우트된 것은 ‘디테일’의 승리였다는 평을 듣는다.

C씨는 B사의 외국인 사장이 한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걸 알아차리고선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내세워 통역 역할을 도맡았다. 그 사장이 영국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영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치밀함도 보였다.

얼마 전 밤 11시. C씨는 야근 중이던 박 과장에게 뜬금없이 와인잔을 구해오라고 했다. 해외 대형 프로젝트 입찰 결과가 예정돼 있어 주요 부서 임직원들이 비상대기 중인 상태였다. 그런데 웬 와인잔?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C씨가 수주 확정에 대비해 사장과 함께 축배를 들기 위해 미리 준비를 시킨 것이었다.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장의 취향을 고려해 와인과 색깔이 비슷한 포도주스를 사오라고 지시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사장님 입이 귀에 걸렸죠.”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 부장의 별명은 ‘김 (비서)실장’이다. 회식에서 그의 자리는 항상 박 전무 옆. 그가 박 전무 옆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와인 때문이다. 박 전무가 와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알고선 와인 얘기를 하며 친해진 것. ‘와인 문외한’이었던 김 부장은 박 전무의 와인 사랑을 전해 듣고는 밤잠을 쪼개가며 와인에 대해 공부해 ‘와인 박사’가 됐다는 후문.

○“외국인이 더 하네…”

“외국 사람들은 아부 안할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티나지 않게, 철저하게 하죠.”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D씨의 말이다.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대부분이 외국인이거나 재미동포, 유학파 출신인 이 회사에서 D씨는 몇 안되는 ‘순수 국내파’다. 그는 최근 미국인 동료 E씨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E씨는 평소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던 인물. 회의 시간에 동료는 물론 상사의 의견까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동료들에게는 “윗사람 기분 맞춰주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맡은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왔다.

그러던 E씨가 얼마 전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글로벌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발탁됐다. 알고 봤더니 인사 담당자와 친분을 쌓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수시로 어필한 게 주효했다고. 회의 때마다 날카로운 비판을 했던 것 또한 인사담당자가 그런 성향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E씨는 의견충돌이 있었던 상사를 나중에 찾아가 화를 풀어주는 등 평판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D씨는 “진짜 고수는 따로 있었는데 겉으로만 잘보이려고 했던 내가 하수였다”고 허탈해했다.

또 다른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외국인 F씨. 한국인 동료 정 대리는 그를 보며 ‘태생보다 문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국의 야근문화가 이해가 안 된다”던 F씨였다. 그러나 1년가량 흐른 뒤 F씨는 솔선수범(?)해서 야근을 한다. 그것도 상사가 잘 알 수 있게 티가 나도록 말이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 또 조심

대기업 직원 이 대리는 지난해 과장으로 조기 진급을 할 뻔하다 사소한 실수로 무산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평소 일 잘하기로 소문난 그는 매년 인사고과에서 최고점을 받아 입사 동기들보다 2년 먼저 진급할 기회를 얻게 됐다. 후배 사원들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 대리에게 한턱을 쓰라고 졸라댔고, 그는 기꺼이 1, 2차 술자리에서 돈을 냈다.

그런데 며칠 뒤 팀장이 조용히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조기 진급한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며? 그렇게 안봤는데 말이야. 자신감이 있는 건 좋지만 지나치면 회사생활에 좋지 않아.” 알고 보니 이 대리에게 한턱 얻어먹은 후배들이 다른 팀에 조기 진급 소문을 전파하고 다닌 것. 이 때문인지 이 대리는 조기 진급에 실패하고 올해 재도전을 앞두고 있다. “인사철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죠. 진급 대상자를 바라보는 눈이 여기저기 많다는 것도요.”

○후배도 챙겨야… 결국 운보다는 실력

대기업 G사의 김 부장은 올해 말 임원 승진 대상에 오른 뒤 부쩍 후배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부하직원의 평가도 승진 심사 때 반영되는 다면평가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평소 후배들에게 엄하고 상사들에게는 충성을 다해 온 그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후배들이 그에 대해 ‘형편없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승진을 장담할 수 없다. 평소 같았으면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야단칠 일이라도 요샌 너그럽게 타이르는 일이 많아졌다. “후배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되네요.”

그런가 하면 갖은 아부와 ‘충성질’에도 불구하고 승진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운보다는 실력’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기업 H사 인사팀 관계자는 “아부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라며 “길게 보면 실력을 갖춘 사람이 이기게 된다”고 했다.

박한신/황정수/전예진/강경민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