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상상에 투자하다
‘뇌의 흥분·억제 기능을 응용한 반도체를 만든다면?’ ‘시력을 인식해 도수를 자동 조절하는 안경이 있다면….’ ‘액체나 기체가 아닌 얼음 상태에서의 화학반응은 어떨까?’

삼성이 미지의 신기술 개발에 본격적인 발을 내디뎠다. 매년 1500억원씩, 10년간 1조5000억원이란 막대한 돈을 기초과학과 소재, 정보통신융합(ICT) 분야의 미래기술 개발에 내년부터 투입한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회사가 됐지만 애플 같은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삼성이 미래먹거리 발굴, 창의력 확보를 위해 던진 승부수다.

○아이디어에 1조5000억원 투입


삼성그룹은 10년간 1조5000억원을 출연키로 한 미래기술육성사업의 1차 지원 대상으로 27개 과제를 선정했다고 14일 발표했다. 지난 8월부터 국내외 과학자들로부터 연구과제를 모집한 뒤 심사위원회 심사와 해외 석학 자문, 현장 실사 등을 거쳐 지원과제를 선정했다.

선정된 과제를 보면 희한한 게 많다. 강헌 서울대 교수가 낸 ‘얼음화학-새로운 화학분야 연구’ 과제는 화학 연구가 수용액이나 기체상태에서의 반응을 연구해왔다는 점에 착안,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얼음 상태에서의 화학반응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다. 얼음화학 연구는 대기·천체과학 분야에서 풀리지 않은 많은 의문점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흥분·억제 기능을 포함하는 신경모방소자 및 이를 이용한 뉴로모픽 프로세서 연구’는 뇌 신경조직의 움직임을 모방해 초저전력 인지 시스템을 가진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연구다. 연구자인 이종호 서울대 교수는 3차원 나노 CMOS(상보형 금속 산화막 반도체) 소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국무총리 표창 등을 수상한 세계적인 반도체 연구자다.

또 ‘희토류 금속을 포함하지 않는 고효율 소재’의 경우 광전자 제품에 극소량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이리듐 등 희토류를 쓰지 않고 고효율의 빛을 내는 소재를 만들기 위한 연구다. 세계 최대 희토류 수출국인 중국이 값을 급격히 올리는 상황이어서 중요한 과제다.

삼성, 상상에 투자하다

○창의력 확보에 목마른 삼성

스마트폰은 2007년 애플이 만들었다. 방심한 삼성은 2010년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특유의 빠른 스피드로 갤럭시S를 내놨고 2년 만에 애플을 따라잡았다. 삼성은 지난 3분기에는 6개 대륙 모두에서 스마트폰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패스트 팔로어는 지금까지 전형적인 삼성의 모습이었다. 과제는 애플과 같은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느냐다. 또다시 누군가 애플과 같은 혁신을 이뤄낸다면 이번에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정한 1위가 되려면 내가 혁신을 주도해야 한다”는 게 삼성의 생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들고 나왔다. 삼성은 여기에 올인하기로 했다. 지난 5~6월 ‘미래기술육성재단 설립’ ‘소프트웨어(SW) 전문 인력 5만명 양성’ ‘상생협력 생태계 조성 프로그램’ 등 연이어 창조경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창조경제가 삼성이 추구하는 성장 전략과 궤를 함께한다는 판단에서 3조원에 달하는 돈을 투입키로 한 것이다.

그중 핵심이 바로 미래기술 육성이다. 삼성은 다음 달 20일까지 새로운 과제를 접수받는다. 매년 두 차례씩 과제를 정하고 여기에 10년간 매년 1500억원을 퍼붓게 된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