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와 그의 손자. 동그라미 3개로 이루어진 램프는 멘디니가 손자들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미니멈 제공
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와 그의 손자. 동그라미 3개로 이루어진 램프는 멘디니가 손자들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미니멈 제공
단발머리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검은 얼굴, 치마처럼 우아하게 퍼지며 내려가는 푸른 색 플라스틱 몸통과 그 옆으로 날씬하게 휘어진 예쁜 팔. 동심이 가득 묻어나는 장난감 인형 같은데, 아니다. 차가운 질감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안나G’(사진)라는 이름의 와인병따개다. 와인병 위에 덮어서 머리를 돌리면 팔이 올라가고, 팔을 잡고 아래로 내리면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다.

안나G는 병따개로서의 기능을 넘어 보는 이를 미소짓게 만드는 감동까지 선사한다. 1993년 첫선을 보였으니 통상적인 상품 사이클이라면 벌써 시장에서 사라졌을 텐데 안나G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에서 1분마다 1개씩 팔릴 정도로 생명력이 왕성하다.

[책마을] 1분에 1개씩 20년째 팔리는 병따개의 비결
《알레산드로 멘디니 일 벨 디자인》은 안나G를 탄생시킨 이탈리아의 세계적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삶과 디자인 세계에 관한 책이다. 최경원 성균관대 겸임교수와 취재팀이 멘디니를 직접 인터뷰하고 멘디니와 함께 일한 기업 현장까지 취재했다. 3년에 걸쳐 완성한 책의 원고와 가제본을 멘디니가 직접 감수까지 한 것도 이례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멘디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는 거장이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멘디니는 1970~1980년대 건축·디자인 전문잡지 ‘카사벨라’, ‘모도’, ‘도무스’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이들 잡지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 놓았다. 뿐만 아니라 자하 하디드, 필립 스탁, 마이클 그레이브스 등 세계 곳곳에서 유능한 디자이너를 발굴해 세상에 알렸고 뛰어난 감각으로 이들을 이탈리아 기업과 연결시켜 디자인과 기업의 동반 성장을 이뤄냈다. 그를 이탈리아 산업 발전을 이끈 ‘숨은 손’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책마을] 1분에 1개씩 20년째 팔리는 병따개의 비결
잡지 편집장 시절 혁신적 디자인 운동을 이끌던 멘디니가 실제 디자이너로 변신한 것은 58세 때인 1989년 밀라노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면서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휩쓴 독일 중심의 ‘좋은(good) 디자인’을 넘어서고자 했다. 디자인 제품은 값 비싼 예술품과 달리 기능성과 대중성(대량 생산과 적절한 가격)을 가져야 한다는 게 ‘좋은 디자인’론이다.

이에 대해 멘디니는 제품의 기능성에 인간의 감성까지 담아내는 ‘벨(bel) 디자인’, 즉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했다. 디자이너의 다양한 생각과 미감까지 구현한 제품이라야 한다는 것. ‘안나G’를 비롯해 그가 사랑하는 손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디자인했다는 동그라미 램프 ‘아물레토’, 의자 ‘프루스트’ 등은 그의 이런 생각을 반영한 디자인 제품이다. 까르띠에, 에르메스, 베니니, 스와로브스키, 알레시, 비사지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멘디니와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거나 하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책에는 공공 공간디자인부터 산업·가구·건축·인테리어·그래픽·모뉴먼트 디자인에 이르는 멘디니의 방대한 디자인 세계와 디자인 철학, 그의 드라마틱한 삶 등이 관련 이미지와 함께 입체적으로 소개돼 있다. 멘디니를 인터뷰한 내용도 육성 그대로 전하고 있어 생생한 느낌을 준다.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쉽고 흥미로운 설명과 독특한 구성도 이 책의 장점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