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대란 누가 키웠나] 방송·인터넷·수돗물 다 멈춘다…전쟁만큼 무서운 '블랙아웃'
“9·11 테러가 다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2003년 8월14일 오후 4시.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서 미국 뉴욕주는 일시에 암흑천지가 됐다.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은 새까맣게 꺼졌고 지하철도 멈췄다. 뉴욕 증권거래소 직원 캐서린 도넬리는 갑작스레 사무실 전기가 나가자 1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도넬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또다시 테러가 일어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전도 '셧다운'

이날 뉴욕뿐 아니라 뉴저지 미시간 오하이오 등 미국 7개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등 북미 북동부 지역에 사상 초유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지하철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어둡고 긴 터널을 걸어서 지상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에 있던 사람들은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병원은 비상 발전기를 돌리느라 분주했고, 전화 통화량이 폭주해 휴대폰은 먹통이 됐다. 뉴욕 뉴저지 등에 있는 9개 원자력발전소도 일제히 가동을 멈췄다.

미국·캐나다 양국 공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블랙아웃은 미국 오하이오에 있는 한 발전소의 갑작스런 정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발전소에 전력 공급이 갑자기 끊기자 주변 발전소로 전기 수요가 몰렸고,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가동을 멈췄다는 것이다.

블랙아웃이 발생한 지 사흘 만에 피해 지역은 정상화됐다. 하지만 이미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뒤였다. 미국은 최소 40억달러에서 최대 100억달러를 피해 본 것으로 추산됐다. 캐나다는 해당 월의 국내총생산(GDP)이 0.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블랙아웃은 안보에도 영향

블랙아웃이 무서운 것은 시스템적으로 전력 수급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전력 공급이 순조롭다 하더라도 한 지역에서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전력공급망은 연쇄적으로 마비된다. 마치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구멍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터져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순식간에 어떤 기능도 할 수 없는 ‘식물국가’가 돼버린다. 일단 전기가 있어야 돌아가는 모든 것은 가동이 멈춘다. 재난방송은 물론 인터넷도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게 된다. 국가안보에 심각한 ‘구멍’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블랙아웃이 발생하면 복구하는 데만 1주일 이상 걸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고립된 섬과 같아 주변 나라에서 전력을 공수해 올 수 없다.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력을 다시 생산해야 한다. 전력 당국은 블랙아웃에 대비해 자체 기동이 가능한 발전소를 전국 곳곳에 미리 정해놓는 등 비상계획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양초에 불을 옮기듯 발전기를 하나씩 살려 대형 발전소로 전기를 보내 전체 전력망을 복구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이틀이면 복구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최소 일주일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에너지 전문가는 “복구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며 “블랙아웃은 전쟁보다 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블랙아웃이 발생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전문가들은 일단 시스템적으로 안전 장치가 겹겹이 있기 때문에 미국처럼 대정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최악의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블랙아웃의 원인은 자연재해, 인적실수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전력 수요가 치솟거나 발전소 한두 개가 고장나면 전력 시스템 전체가 정지하는 블랙아웃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2011년 9월15일 발생한 전국적인 순환단전은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불필요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항상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