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달려가는 곳은 탈롱의 레스토랑. 벌써 카베린이 와 있으려니 확신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병마개가 천장으로 치솟고, 술병에선 혜성 포도주가 철철 흐르고, 식탁 위엔 피투성이 로스트비프며 프랑스 요리의 결정판 젊은 날의 사치인 송로버섯이며, 스트라스부르산의 썩지 않는 파이가 신선한 림부르흐 치즈와 황금빛 파인애플에 둘러싸여 있었다. 커틀릿의 뜨거운 기름에 목이 타니 샴페인 한두 잔 마시면 좋으련만~.’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푸시킨(1799~1837)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대목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오네긴이 오후면 찾아가던 프랑스 레스토랑의 풍경이다. 탈롱의 레스토랑은 페테르부르크의 번화가에 실존했던 곳으로 프랑스 요리사 피에르 탈롱이 1810년대 중반에 개업했고, 당대 귀족들이 즐겨 찾았다. 푸시킨도 이 레스토랑을 좋아했다.

주목할 것은 이 레스토랑의 모든 요리와 술이 수입품이라는 사실. ‘썩지 않는 파이’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수입한 거위간 파이로, 통조림 상태로 들여오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송로버섯, 캐비아와 함께 세계 3대 진미로 꼽힌다. 설익혀 육즙이 흥건한 로스트비프와 뜨거운 기름에 튀겨낸 커틀릿은 영국에서 들여온 요리법으로, 당시엔 러시아 육류 요리보다 훨씬 세련된 요리로 여겨졌다. 러시아는 19세기 초에 파리식 레스토랑 문화를 받아들여 크게 유행했고, ‘예브게니 오네긴’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캐비아는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인데도 러시아산이라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는 이처럼 푸시킨부터 솔제니친까지 10명의 러시아 문학 거장들이 음식을 어떤 코드와 상징으로 끌어들여 문학세계를 풍성하게 일궜으며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유럽을 향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표트르 대제 이후부터 러시아혁명과 내전을 거쳐 소비에트국가가 자리잡기까지 역사의 흐름을 따라 ‘남의 음식 대 나의 음식’ ‘육체의 양식 대 영혼의 양식’ ‘옛 음식 대 새 음식’ 등으로 변화한 식문화와 음식, 이를 상징적인 코드로 형상화한 작가와 작품을 꼼꼼히 짚는다.

푸시킨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남의 것’으로 들어온 프랑스 요리를 포용해 유럽의 문학을 넘어서고 가장 러시아적인 문학을 창조했다. 이에 비해 톨스토이는 프랑스적인 모든 것을 증오했다. 그의 소설에선 나쁜 인간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지껄이고 프랑스식 옷을 입고 프랑스 음식을 먹는다. ‘안나 카레니나’의 추악한 사교계 인간들은 ‘하필’ 프랑스 극장을 드나들고 불륜의 주역 브론스키와 안나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속삭인다. 톨스토이는 프랑스적인 것에 푹 빠져 있던 러시아 상류층의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는 상징으로 프랑스 요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곤차로프(1812~1891)는 러시아 음식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오블로모프’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요리를 선보이며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하다는 철학을 전달했다. 고골(1809~1852)은 엄청난 대식가였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식욕을 ‘악마’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뱃속의 악마’를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검찰관’의 식충이 홀레스타코프에 투영해 식욕과 죄의식 사이에서 시달리다 결국 거식증으로 죽어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통해 음식을 생명의 양식이자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초월시켰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평범한 가정식과 마가목 열매로 닥터 지바고의 시혼을 지폈고,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음식을 통해 시베리아수용소의 짐승화된 공간에서도 짐승처럼 전락하지 않는 인간의 고결함을 보여줬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러시아 문학에 담긴 음식기행을 마친 저자의 결론은 먹기에 대한 개개인의 태도가 미식이냐 탐식이냐를 결정한다는 것. 맛있게 먹고, 감사하게 먹고, 나눠 먹는다면 세상 모든 것이 미식이고 결국 마음의 평화와 만나게 되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