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이 제자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에는 학문을 닦고 진리를 구하는 조선시대 대학자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월천은 송나라 때 책인 ‘심경부주’가 정통 주자학에서 벗어났다며 크게 비판했는데, 스승인 퇴계는 이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그 과실은 스스로의 주장을 지나치게 하는 것에 있다. 문자상의 흠을 찾아내는 데 힘쓰지 말라.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뜻을 공손히 해 그 책을 숭상하면 그 한 마디 한 구절을 스승과 법으로 삼아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이 사문수간은 ‘원보(院寶)’로 불린다. ‘도산서원의 보물’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대학자 퇴계의 학문적 근거지로서 진리와 학문을 추구하고 지식과 도덕의 지역 거점으로 기능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에서 펴낸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지식이 보존되고 전파되는 과정, 영남의 지식문화에 끼친 영향을 밝힌 학술서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서원자료 연구팀이 작년 한 해 동안 연구한 결과를 묶었다. 학술 용어와 옛 어휘가 많이 나오지만 풍부한 인용 및 자료 사진은 조선시대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들은 서원이 갖는 정치적 기능, 즉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로서의 성격보다는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문화센터’로서의 특성에 주목했다.

퇴계는 바로 위 친형인 이해가 사화에 연루돼 죽는 사건을 겪으면서 당시의 유학자라면 갖기 마련인 ‘임금을 도와 경륜을 펼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대신 향촌에서 자신의 이념 아래 백성들을 교화하며 후학을 길러내겠다고 생각했다. 임금에 의지하지 않고도 지역 단위의 이상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고 지식을 만들어 전파할 사람을 길러내야 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운영권을 장악해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퇴계 사후에는 도산서원이 만들어졌고 부침 끝에 서원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수원(首院)’으로 인정받았다.

서원은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했다. 학파와 학설을 넘나드는 의견을 내고 심도 있게 토론하는 강회가 대표적이다. 당시 문인인 이만인과 이만여가 주고받은 대학에 관한 문답에는 강회의 단면이 실려 있다.

“진실로 그 근본을 강구한다면 학문도 중요하지만 몸소 실천하는 체행이 급선무다. 아우께서 이미 대학을 읽고 이를 밝게 해달라고 청하는 바, 가령 신민(新民)을 읽으면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우리 백성들의 얻음이 혹 오염되고 더러운 것은 없는가?’라고 생각하면 ‘새롭게 함’의 뜻을 알게 된 것이다.”

서점이나 책을 유통시키는 시장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사회에서 지방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고 알리고 싶은 지식을 퍼뜨리는 공간으로 서원을 활용했다. 문인들은 서원에서 책을 직접 만들어 보급하고 서로 주고받았다. 도산서원에는 상재협실과 광명실이라는 서책 보관실도 있어 엄격하고 세밀하게 책을 관리하기도 했다.

도산서원은 지역 백성의 여러 문제를 판단하고 조정했으며 효행 열녀를 포상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역의 공론을 주도하고 성리학적 이념을 전파하는 거점으로도 기능한 것이다. 지역 사족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결사체의 성격도 있어 때로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즉 영남에 분포돼 있던 서원은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사적 네트워크로 기능하며 조선 사회 운영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