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중·일 장관회의에 참석한 경제부처 장관은 “일본의 국운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그들의 언어 사용법에서도 느꼈다”고 했다. “같은 표현을 한국과 중국의 장관은 간결하게 하는 반면, 일본 장관은 빙빙 돌려서 하더라. 통역은 간단하게 끝나는데도 일본말로는 두 배쯤 더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그건 문제없습니다”는 말을 중국어로는 “메이유관시(沒有關系)”라고 하는데, 일본어는 “소레와 몬다이데와 나이다토 오모이마스(それは問題ではないだとおもいます)”라고 하는 식이다. 한국말로 직역하면 “그것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는 뜻이다.

딱부러지게 말해도 될 것을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는 게 입에 배다 보니,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매사 이런 식이니 듣는 사람이 답답해지고, 글로벌 경쟁과 커뮤니케이션의 요체인 효율과 스피드에서 갈수록 일본이 뒤처질 수밖에 없겠다는 게 그의 소감이었다.

상의하달 ‘메이지 유신’의 그늘

20세기 후반부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을 석권할 듯 기세를 올렸던 일본 저력의 원천은 1867년 메이지(明治)왕 즉위와 함께 단행한 ‘메이지 유신’이었다. 일본은 구미(歐美)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중앙집권체제와 함께 주요 산업 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 막부(幕府)체제를 왕정(이른바 ‘대정봉환’)으로 되돌리고 서양문물을 흡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근대적 시민주의를 고취시켜 개개인의 각성과 창의력을 일깨운 개혁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은 명백한 한계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던 메이지 유신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혼네(本音·본심)’를 마음속 깊이 감추고 ‘다테마에(建前·겉 표정)’를 관리하는 행동문화를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식으로는 급변하는 상황에 맞춘 대처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게 당연하다. 글로벌 대량 생산 패러다임이 디지털 창의경제로 급속하게 이행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의 쇠락기에 빠지게 된 것과, 상의하달(上意下達)식 메이지 유신이 무관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한국 스타일, ‘자신만만’ DNA

바깥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기보다는 편하게 안주하려는 젊은이들로 인해 한국보다 인구가 3배 가까이 많은 일본이 해외 유학생 숫자는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현실은 그런 문화의 유산이 아닐까. 불확실성과 맞서 이겨내려는 도전의식의 결여는 정규 직장을 외면한 채 ‘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쉽게 그만두는’ 프리터(freeter)족의 분출로도 나타나고 있다.

메이지 연대에 일본과는 정반대로 ‘쇄국’을 고수했던 한국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산업화에 나선 이후에도 일본식 경제정책과 시스템을 상당부분 따라하는 ‘카피캣(copy-cat·모방자)’의 길을 걸으며 ‘후발자의 굴욕’도 곱씹었다. 그랬던 한국이 정보기술(IT) 전자 자동차 등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추월하고, 마침내 국가신용등급에서마저 일본을 앞섰다. 그렇게 된 요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차고 넘친다.

분명한 건 싸이의 ‘강남스타일’, 김기덕의 ‘피에타’처럼 자신감과 개성이 넘치는 한국인들의 창의와 도전정신 DNA가 거침없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국운 상승’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북돋고 도와주는 정치·행정시스템이다. 정치권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