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지구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소통을 더 잘하게 됐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불통의 시대’가 온 겁니다. ‘소통’이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정보를 흡수시키고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소통학의 창시자 도미니크 볼통은 6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 주최 문화소통포럼(CCF)에 참석해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서로 뭘 하고 있는지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됐지만 기술적인 소통이 인간적인 소통까지 가져오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산하 소통과학연구소 소장인 그는 《또 다른 세계화》(살림)에서 “세계화는 지구촌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허울뿐인 전쟁”이라고 고발한다.

볼통 소장은 세계화를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엔이 결성되면서 벌어진 ‘정치 세계화’, 2단계는 1950년대와 1970년대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이뤄진 ‘경제 세계화’, 3단계인 지금은 컴퓨터와 인터넷, 무선통신 기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만들어낸 ‘문화 세계화’다. 그는 “소통 도구의 발달은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며 “그러나 인류의 문화적 차이와 종교적 특수성,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더 눈에 띄게 됐고, 영구적인 대립과 몰이해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볼통 소장은 진정한 ‘문화 세계화’를 이루기 위한 21세기의 핵심 과제로 ‘문화 공존’을 꼽았다. 대기업, 정부 등 거대 문화 산업체들은 전 세계에 정보를 쏟아내기만 할 뿐 정보를 받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다양성과 문화의 독창성으로 성공을 거둔 예로 ‘한류’를 꼽았다.

“K팝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국제 시장을 겨냥해 영어로 몇몇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한국의 이야기, 한국의 음악, 한국의 춤, 한국어가 가진 독창성으로 세계적인 현상을 이끌어낸 것이죠.”

그는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전략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볼통 소장은 “문화적 뿌리와 토대가 없는 상품은 영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삼성이나 LG가 해외에서 뛰어난 기술력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왜 광고에는 ‘한국의 것’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삼성을 일본 기업으로, 현대를 중국 기업으로, LG를 미국이나 독일 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볼통 소장은 “삼성은 아주 복잡하고 기술적인 상품을 생산하지만 그 안에는 국가적 정체성과 수완, 지적 능력이 함유된 문화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며 “단순한 기계가 아닌 한국인의 창조성과 독창성, 뛰어난 기술력을 구현한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국적기업의 과잉 시대에 출신 국가의 정체성과 문화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소비자에게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20세기 말 20년이 통신기술과 경제에 지배 당했다면, 21세기 초는 문화적 충돌과 테러리즘으로 인본과 소통 정치학이 지배하는 시기라고 주장한다. 문화 공존과 소통의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함께 고민할 때 경제적인 세계화를 넘어 진정한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수많은 언어와 다양한 국가가 공존하고 있는 유럽연합에서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이 지금은 평화의 중심지로서 세계 각지 지역 공동체의 핵심이 됐다고 분석했다. 냉전에 의해 오랫동안 분리됐던 동유럽 국가들이 통합됐고, 이들의 정체성과 충돌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볼통 소장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제적 협력에 먼저 뜻을 같이하며 국경을 걷어내고 단일 통화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27개국의 언어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문화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좋은 모델”이라고 덧붙였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