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1~2년, 길어야 수년 정도인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CEO)를 17년째 계속하고 있는 장기철 스트라이커 한국&아세안 본부 사장(51). 장 사장은 성공의 비결로 ‘3·3·3 원칙’을 내세웠다.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 역량 3가지를 선정한 다음 각각 역량을 쌓기 위한 경험을 3년씩 3번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 사장은 실제로 그랬다. 그에게 “결과론적 얘기 아닙니까”라고 묻자 “1차 목표를 위한 핵심역량을 쌓는 데 10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트라이커는 무릎관절(슬관절), 엉덩이관절(고관절), 척추관절 등 인공관절 분야 글로벌 의료기기업체다. 지난해 글로벌 매출 83억달러를 올린 스트라이커는 12개국에 제조공장과 유통사업부를 두고 있다. 장 사장이 이끄는 스트라이커 한국&아세안의 2005~2011년 연평균 성장률은 약 20%(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9년 제외). 1989년 창립 후 수백만 달러에 불과하던 매출은 꾸준히 올라 지난해 8900만달러를 기록했으며 직원 수도 155명으로 늘었다.

○궂은 일 마다 않는 ‘영업형’ 엔지니어

서울대 섬유고분자공학과(80학번) 재학시절 장 사장은 교수나 연구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꿈은 ‘CEO’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해외취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일천했기 때문에 ‘외국 물’을 먹고 오면 남보다 앞서나갈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1986년 석사를 마친 후 친척이 살고 있던 미국 인디애나폴리스로 향했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 되나’ 고민하던 그는 일단 ‘맨땅에 헤딩’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미국 최대 기업연감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Dun&Bradstreet)’를 보면서 알파벳 순으로 기업을 훑었다. 본사 주소, 직종, 직원 수 등 간단한 정보를 보고 직원 수 1500명 이상인 500개 기업에 이력서를 보냈다. 이 중 첫 직장의 인연을 맺은 곳은 미 노스캐롤라이나 스핀테일시 소재 ‘스톤커터’사다.

스톤커터에선 섬유공장 현장 관리업무를 맡았다. 섬유가공, 화학처리 등이 주 업무였으니 전공을 제대로 살린 셈이다.

입사 3년째 되던 1989년 장 사장은 영업직에 도전하기 위해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를 다시 꺼내 펼쳤다. 이번에는 미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대기업 모튼인터내셔널사에 인연이 닿았다. 당시는 전자제품 자동차 등 경쟁력을 기반으로 기세가 등등하던 일본이 미국에 앞다퉈 진출할 때였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자동차 및 부품 도장용 페인트 세일즈. 주 영업대상은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자동차회사였다. 스톤커터사 재직 시 틈틈이 쌓아뒀던 일본어 실력이 여기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장 사장은 이곳에서 낮에는 일본 고객들의 동선을 쫓아다니며 악착같이 인간관계를 다졌다. 일본 음식을 공수해 대접하고, 같이 사케(일본 술)를 마시거나 고객들 가족이 좋아할 만한 도시락통이나 간단한 선물을 선사하며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다. 결국 첫 영업에서 경쟁사인 미 듀폰사 등을 제치고 프로젝트를 따냈다.

그가 인간관계에만 주력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모튼사 재직 시 퇴근 후에는 엔지니어로 돌아와 혼자 집 앞 마당에서 페인트 성능에 대한 화학적 실험을 해가며 데이터를 쌓았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 세일즈맨의 장점은 테크니컬하게 대답을 하며 무한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에게 회사 측은 야간 경영학석사(MBA)과정을 다니게 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년째 되어가던 1992년, 모튼 본사에서 인사발령이 났다. 영국 런던에 새로 들어서는 지점장으로 근무하라는 명령. 그는 이때를 ‘인생의 기로’였다고 회상했다. “6년을 굴렀으면 됐다. 이제 한국으로 갈 때다.”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귀국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재무업무 경험이라는 생각에 한국암스트롱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지원해 1995년까지 재직했다.

○직원이 없으면 고객도, 회사도 없다

한국암스트롱에서 보낸 지 3년째, 이번에는 한국EMI 등 다국적 음원사와 패션사 등에서 헤드헌팅업체를 통해 CEO로 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스트라이커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는 그렇게 크지 않은 회사였지만 지난 20여년간 매출이 지속 상승한 점을 주목했다.

장 사장은 스트라이커의 성장 비결로 열정, 도전적 사풍을 뽑았다. 그가 1995년 존 브라운 미 스트라이커 본사 사장과 빌 라우베 아시아태평양본부 사장 앞에서 면접을 볼 때다. 3년마다 보따리를 싸서 옮겨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에 대해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재직기간 중 가장 큰 위기로 1999년 외환위기 이후를 꼽았다. 1995년 부임 이후 “돌격 앞으로” 식으로 조직을 이끌어 왔던 것에 대해 직원들의 반발이 나타난 것. 한국스트라이커는 그가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6년 새 CEO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만큼 불안정했던 회사를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채찍을 들고 회사를 이끌어왔다. 결국 퇴사자들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 과로에 실신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장 사장이 스스로 “철이 들게 됐다”고 평가한 시점이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 ‘워크&라이프 밸런스(일과 삶의 조화)’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사내 복지 향상에 몰두했다. 매주 월요일을 ‘소통의 날’로 정하고 직속 선후배들끼리 대화의 시간을 갖게 했으며 스포츠, 음악 등 동아리를 만들었다. 또 갤럽에 의뢰해 모든 직원들에게 일종의 심리분석인 ‘강점테스트(strenthsfinder)’를 받게 하고, 테스트 결과대로 업무를 재배치하거나 직원 비전 설정을 도왔다. 이 테스트는 스트라이커에 들어오거나 다니려면 매년 받아야만 하는 필수 코스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고, 그래야 충성도와 생산성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스트라이커의 만족도와 근속연수가 전 세계 지사 중 으뜸”이라고 설명했다. 평균 연봉은 5000만~6000만원 수준이지만, 영업성과에 따라 3년차 미만 사원도 1억원 이상 고액 연봉자가 될 수 있다.

○싹수가 보여야만 간다

장 사장은 국내 의료기기 시장에 대해 ‘품질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국이 될수록 노령화사회가 되고 국가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보다 더 빨리 환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보험수가 인하는 피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약가인하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그는 보고 있다. 일례로 그가 스트라이커로 온 1995년 인공관절 1세트의 보험수가는 400만원이었지만 현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 상황을 이겨내려면 품질 혁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장기간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효과를 보여주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트라이커의 주력제품 슬관절 등은 몸에 부착하고 10~20년이 지나도 부작용이 없을 때 비로소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6세 때부터 해 온 그의 첼로 연주실력은 수준급이다. 지난해 직원들과 함께 사내 연주회를 갖고 첼로를 연주했더니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는 후문이다. 올해는 사회공헌활동(CSR)의 하나로 장애인 혹은 노인 등 관련 단체를 찾아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40대 후반 들어 그에게 새로 생긴 목표는 소설을 한 편 쓰는 것. 원래는 작곡도 목표에 있었지만 몇 번 하다 포기했다. “클래식을 하고 싶었는데 자꾸 뽕짝이 돼서 접었다.” 싹수가 없는 건 시작을 안하는 그의 스타일대로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