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미디어가 만든 '가짜 욕망'을 소비하는 사회
9·11 테러 이후 세계인들의 머릿속에는 ‘이슬람=테러’라는 등식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라는 아랍인의 이미지는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1990년대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이슬람인에 대한 과격 이미지를 심어왔다. 사회주의 몰락 후 공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을 대체할 대안이 아랍의 테러리스트였던 것.

2008년 촛불시위 때에도 ‘미국산 쇠고기=광우병’이라는 과잉 이미지가 탄생했고, 전 사회를 휩쓸었다. 발단은 ‘PD수첩’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이 만들어낸 과잉 이미지였다.

《하이퍼리얼 쇼크》는 디지털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가공의 이미지들이 자기증식하듯 난무하는 ‘하이퍼리얼(hyper-real)’ 세계를 진단한 책이다. 하이퍼리얼은 프랑스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한 개념. 보드리야르는 실재하지 않는 가짜의 이미지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 명명하고,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가짜 세상을 하이퍼리얼이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미디어가 대중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면서 사람들은 자본과 미디어가 편집한 이미지들을 가공 없이 접하고 보이는 대로 믿는다”며 “실재하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현실을 포장하고 현실을 바꾸어 버리는 것, 이것이 하이퍼리얼”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9·11 테러사건 이후 이슬람의 이미지, 가짜 문서가 부른 유대인 대학살, 광화문 촛불시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 혈액형 성격학, 명품 중독, 포르노그래피의 속성 등 11가지 현상을 통해 우리 현실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하이퍼리얼 개념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지나치게 미디어에 의존하는 현대 소비사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진다.

그는 가짜이면서도 진짜처럼 광범위하게 인식되는 가짜 현실이 과잉 이미지를 확산하는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현실로 자리잡게 된다고 주장한다. 가짜의 이미지가 스스로 증식해 새로운 실체를 만들면서 원본으로 행세한다는 것이다.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양산된 ‘B형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전형적이다. 혈액형에 대해 부여된 실체 없는 이미지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혈액형이라는 문화 트렌드가 생겨나고 상품화까지 이뤄졌다.

[책마을] 미디어가 만든 '가짜 욕망'을 소비하는 사회
‘엄친아’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뭐든지 잘하고 우월함을 갖추고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뜻이 없지만 ‘잘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S라인’이나 ‘식스팩’ 신드롬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이퍼리얼 세계에서는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자본의 욕망만을 소비하게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같은 조건에서 시공한 아파트라도 사람들은 유명 스타가 광고하는 브랜드 아파트를 선호한다. 아파트의 본질인 기술력보다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이미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명품 소비도 마찬가지. 상품의 질이나 내용보다 이미지, 즉 기호가치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하이퍼리얼을 긍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시뮬라크르에 압도당하지 않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타자화된 욕망이 아닌 진짜 나의 욕망을 알 때 하이퍼리얼을 추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미디어의 허구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도록 ‘미디어 독해력’을 키우라고 권한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