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은하철도999'의 주인공 '철이'의 본명은 알고보니 '호시노 데쓰로(星野鐵郞)'였다. 개구리 왕눈이가 살던 '무지개연못'도 일본에 있었고,지구를 지키던 마징가 역시 '일제'였다. 1980년대 이 만화들을 보고 자란 한국의 30,40대는 한동안 속고 살았다. 만화영화뿐만 아니다. 감수성을 자극했던 '그때 그시절'의 적지 않은 가요가 일본 노래의 영향을 받았다. 일부는 그대로 베꼈다. 한참 지나서야 알려진 일이지만.

TV의 각종 오락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직 지상파 방송사 PD의 고백."아이디어가 고갈됐을 땐 일본 방송이 잘 나오던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여관 잡아놓고 며칠씩 일본 프로그램을 보며 차기작을 구상했다. "1980년대 일본 대중문화의 힘은 그만큼 셌다. 최근 도쿄를 찾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기억."1980년대 영국에서 유학을 했는데,그 무렵 영국인들 사이에서 '스시 먹으러 간다'는 말은 '고급 문화를 즐길 줄 안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

일본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토양은 일본 기업이었다. 당시 전 세계 청소년들의 애장품 1호는 소니의 '워크맨'이었다. 1979년 첫선을 보인 이래 2억대 이상 팔려 나갔다. 지금의 '아이폰 열풍' 딱 그 모습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의 바통을 일본이 이어받을 것이라는 암시를 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 시절 일본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모든 게 부러운 것 투성이였다. "(1980년대 쓰쿠바대를 다녔던 권철현 전 일본대사)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한국이 일본의 성공스토리를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선 대중문화.일본 내 '한류'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한국 가요의 인기는 프랑스 등 유럽으로도 확산되는 추세다. 최근엔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싹쓸이하는 등 클래식 한류의 바람도 거세다.

'고급 문화'의 반열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한국 음식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최근 일본의 한 우익 인사가 "생각 없는 일본 방송사들이 한국의 저급한 음식문화를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통탄'할 만큼 일본 방송 프로그램에는 한국음식을 소개하는 코너가 많다.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 여성들이 김치 같은 야채를 많이 먹어 피부가 뽀얗다'는 '루머'까지 나돈다. '소녀시대'와 '김치'의 인기도 한국 기업의 약진과 맥이 닿아 있다. 한국 기업들은 전자 자동차 조선 등 각 분야에서 경쟁 국가들을 긴장시키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대만 대표기업 훙하이정밀공업의 궈타이밍 회장이 "한국의 삼성을 꺾으려면 대만과 일본이 손을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다.

1980년대 일본의 성공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의 시간은 '잃어버린 세월'이 돼 버렸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최근 특파원 간담회 자리에서 일본 쇠락의 원인에 대해 "경제와 문화가 융성하더라도 '정치'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결국 국운이 쇠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판은?'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논쟁으로 날이 샌다. 여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조차 대기업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여의도에 마치 '포퓰리즘 올림픽'이 열린 듯하다. 요즘 한국의 정치에서 과거의 일본이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건 착시일까. 몇 년 뒤 한국마저 '잃어버린 세월' 타령을 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