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남 · 차도녀(차가운 도시 남자 또는 여자)','까도남 · 까도녀(까칠하고 도도한 남자 또는 여자)' 전성시대다. 차도남은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현빈처럼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사랑 앞에선 무한히 약해지고 따뜻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며 이 세상엔 오직 단문만 존재한다는 듯한 시크한 말투,말끔한 더블 브레스트 수트,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뻣뻣하고 불친절한 태도로 무장했지만 자기 일만큼은 똑 뿌러지게 해내는 능력자이기도 하다.

매일 이어지는 삼겹살 회식에 배불뚝이 아저씨가 된 김 과장,간이고 쓸개고 다 빼놓고 팀장 비위 맞추는 데 혈안이 된 이 대리는 애써 "드라마에나 나오는 별나라 사람 얘기"라며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차도남 콤플렉스'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金과장 & 李대리] '차도남' 동료는 피곤해…같이 일하기엔 역시 '따도남' !

◆내겐 너무 먼 당신 차도남

차도남,까도녀는 성격보다 외양으로 우선 규정된다. 딱 떨어지는 수트발,빳빳한 셔츠 깃,클래식한 구두는 기본이다. 태도만 뻣뻣하다고 차도남이 되는 게 아니다. 실력도 있고 운동으로 식스팩 복근까지 갖춰야 완벽하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임지연 대리(28 · 여)는 "차도남 이미지의 핵심은 자기관리"라며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삼겹살에 술 먹고 냄새를 풍기거나,숙취로 해롱대는 풀린 눈을 보이면 그 순간 신데렐라의 마법은 풀리고 평범한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공기업에 다니는 김남희 대리(33 · 여)는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지려면 일단 좋은 옷과 가방을 갖추고 화장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며 "돈도 많이 들거니와,아침에 머리 감고 말릴 시간도 없어 우왕좌왕하는 내겐 너무 먼 이야기"라고 한숨을 쉬었다.

◆향기없는 꽃…그대 이름은 차도녀

국내 한 대기업의 글로벌 마케팅팀은 이른바 차도녀로 불리는 여 대리 때문에 팀 분위기가 냉랭하다. 곱상한 외모에 모델 뺨치는 패션감각을 지닌 이 차도녀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도도하고 우아하게 출근하는 순간,팀원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 팀원들을 마치 벌레 보듯이 하는 매서운 눈초리는 둘째 치더라도 팀원들에게 안하무인식으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태도는 팀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 대리도 있는데 왜 이 일을 제가 해야 하죠?","회장님께서 오후 7시 이후 야근을 최대한 자제하라고 방침을 세웠는데 왜 우리 팀만 하루걸러 야근을 하나요?"라는 개념없는 발언을 할 때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다.

같은 팀에서 일하는 한 팀원은 "번지르르한 외모만 믿고 잘난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게 고역"이라며 "향기없는 꽃만큼 매력없는 인간 때문에 사내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하소연했다.

◆치질수술 한번에 '훅' 간 차도남

대기업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최일규 씨(31)의 동기는 그야말로 차도남이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영업실적도 탁월하다. 남의 뒷말하기 좋아하는 '범인'들과 달리 무심하고 시크하게 자신의 업무에만 몰두하는 최씨 동기에게 여직원들은 유독 깊은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 차도남의 '위엄'이 한 방에 무너졌다. 병가를 내고 그가 회사에 나오지 않은 동안 부장이 그만 "아무개 치질 수술하러 갔어"라고 입방정을 떤 것.수술을 마치고 동기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최씨는 "쟤 치질 수술하고 왔다'란 생각이 들 때마다 차도남 특유의 '아우라'가 사그라드는 것 같다"고 전했다.

◆'까도녀'를 넘은 '까강녀'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박진만 씨(30)의 상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까도녀'다. 거래처에 보내는 메일을 그 바쁜 와중에도 '손수' 검토해 "아무개씨,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라는 메일을 보내 부하들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부하의 업무 성과가 성에 차지 않으면 본인이 철야를 해서라도 깔끔하게 정리한 후 다음 날 출근한 부하에게 까칠한 일격을 한마디 날린다.

그러나 그 까칠함 뒤에는 철두철미한 완벽함이 있기에 그 누구도 불만을 토해내지 못하는 상황.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아 덜렁대는 부하들은 모두 까도녀 상사를 두려워한다. 박씨는 한번 야근을 하면서 상사에게 메일을 보냈더니,메일 발송시간까지 체크하는 '디테일한' 상사가 "아무개씨,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다니 좋은 자세입니다. 앞으로도 정진 바랍니다"라는 답메일을 즉시 보내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까도녀 상사는 그 와중에 아이까지 둘이나 길러놓는 등 사생활도 깐깐하게 관리해 모두의 기를 죽이곤 했다. 옷매무새도 늘 완벽하다. 박씨는 "상사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을 연상하게 하는 까칠한 도시여자"라며 "거기에 왠지 모를 '부티'까지 나 우리끼리 '까강녀'(까칠한 강남여자)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까도남의 미친 반란

국내의 한 중견회사 경리팀에 다니던 김민한 과장(가명)은 최근 헤드헌팅사를 통해 이직을 했다.

사연은 이랬다. 작년 송년회가 끝나고 회사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내용은 "몇 명이 3차를 간 뒤 비용을 공금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런 식으로 공금을 유용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김 과장이 데리고 있던 한 사원.'원리주의자'나 '까칠남'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그 사원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글을 게시판에 올린 뒤 사표를 내 버렸다. 결국 공금유용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김 과장이 뒤집어 썼다.

김 과장은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해 해결을 시도해본 다음에 공론화하는 게 좋았을 텐데,곧바로 게시판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해명할 틈도 없이 모든 일이 여론재판으로 흘러버렸다"며 "소통에 문제가 있는 까칠한 동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팔자려니 하고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따도남 · 따시녀도 있는데…

애초에 차도남이니 까도녀니 하는 말이 유행하는 것 자체가 대다수 김 과장,이 대리들에겐 스트레스일 뿐이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김인모 대리(32)는 "가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직장 동료들이 있지만 실은 다들 백조처럼 물밑에서 엄청난 부지런을 떤 결과"라고 지적했다.

중견기업의 강시구 과장(35)은 "차도남이나 까도녀에 대응하는 말로 따도남 · 따도녀(따뜻한 도시 남자 또는 여자),따시남 · 따시녀(따뜻한 시골 남자 또는 여자)라는 말도 생기고 있다"며 "이미지는 자신이 가꾸기 나름"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