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의 국민의례 거부가 발단이 돼 노사 갈등이 확산되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의례를 거부한 연구원에 대한 계약 해지가 최근 결성된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노조와 경영진 간에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한국노동연구원은 최근 입사한 지 2년된 H박사가 국민의례와 박기성 원장의 업무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를 들어 계약 해지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지난달 국내 최초로 결성된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노조는 계약 해지 사유가 부당하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박사노조원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위원협의회는 17일부터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9층 한국노동연구원 사무실 복도에서 계약 해지에 대한 항의 표시로 72시간 동안 세미나투쟁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의결정족 수를 채우지 못해 결정을 못 내리고 18일 임시총회를 열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H박사는 국민의례는 '전체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를 들어 매월 한 차례 열리는 경영설명회에 불참해 왔다. 노동연구원은 경영설명회 때 국민의례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박 원장은 H박사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인 노동연구원에서 근무하는 점을 강조하고 국민의례에 참여할 것을 여러차례 요구했으나 H박사는 오히려 경영설명회 때 국민의례 생략을 주장해왔다.

H박사는 경영진의 강요와 설득으로 지난 3일 처음으로 경영설명회에 참석했지만 여전히 국민의례는 거부했다. 다른 참석자들이 국민의례 때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H박사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날 경영설명회에서는 다른 박사노조원 10여명도 H박사를 지지하는 표시로 국민의례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례란 공식적인 의식이나 행사에서 국민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격식을 말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애국가 제창,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도 자체 행사에서는 국민의례 대신 노동의례,민중의례로 대신하지만 소속 노조원들이 국가 행사에 참여할 경우에는 국민의례를 거부하지 않는다. 최저임금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에 참여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 대표들도 국민의례 순서가 되면 경총이나 정부관계자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와 국체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이와 함께 H박사에게 계량경제학을 전공한 점 등을 고려해 산재보험료율을 연구할 것을 요구했으나,H박사는 노동시장 분야에 관심이 많다며 업무지시를 거부해왔다. 이에 대해 KDI의 모 연구위원은 "어떻게 원장의 지시를 입사 2년도 안 된 신참 박사가 거절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노동연구원에 박사노조가 결성되고 박사들이 원장의 운영 방침에 반발하는 것에 대해 노동학자들은 이념적 갈등과 밥그릇 싸움으로 보고 있다. 노동연구원에는 좌파적 시각을 가진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러다 보니 국책연구기관이면서도 노사관계에 대해 균형잡힌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노동부 고위 관계자는 "노동연구원에는 좌파적 시각을 갖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프로젝트를 맡는 연구원들이 많다"며 "균형감각을 필요로 하는 노사관계 관련 용역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노동연구원에 맡길 수 없을 정도"라고 아쉬워 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박사) 20명은 지난달 13일 박 원장의 연구원 운영 방식이 독단적이라고 반발하며 박사급 연구위원들만의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서울 영등포구청이 "기존 노조의 규약상 박사급 연구위원도 조직 대상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신규 노조는) 복수노조에 해당된다"며 설립신고서를 반려한 상태다. 현재 한국노동연구원에는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산하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노동연구원지부가 설립돼 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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