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로 온라인게임이라는 새로운 게임 장르를 만들어낸 넥슨에는 독특한 사내 제도가 있다. '허들시스템'이라고 불리는 게임개발 검증절차다. 창의적인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장애물을 직원들이 함께 헤쳐가자는 뜻에서 허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정 프로젝트의 소속 팀원이 아닌 사내 개발자들이 모두 참여해 게임 기획 단계부터 분기 단위로 개발 과정을 점검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자리다.

넥슨은 5년 전 EA(일렉트로닉 아츠)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들의 사내 제도를 벤치마킹해 허들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동안의 주먹구구식 개발 방식으로는 더 이상 혁신적인 게임이 나오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넥슨처럼 체계적인 검증 시스템을 갖춘 국내 게임회사는 거의 없다. 엔씨소프트도 최근에야 비슷한 사내 제도를 만들었을 정도다. 국내 게임회사들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발굴하려는 노력을 그만큼 등한시해왔다는 방증이다.


◆개방형 조직문화가 창의성 살린다

지난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임개발자회의(GDC)에서 콘솔게임 '메탈기어'로 유명한 고지마 히데오 감독은 "대다수 일본 게임회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기획력에만 의지하는 구시대적 방식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EA 등 미국 게임회사들은 기획력은 물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력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부러워했다.

미국과 일본 게임회사의 기술력 격차는 기업 문화 차이의 영향이 크다. 미국 게임회사는 사내 정보 공유가 활발하다. EA 직원들의 경우 다른 팀의 프로젝트 개발 상황을 수시로 열람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는 다른 프로젝트에 곧바로 활용되기도 한다.

반면 일본 게임회사 직원들은 다른 팀에서 어떤 기술이나 방식으로 게임을 만드는지 모를 만큼 조직이 폐쇄적이다. 한국 게임회사들도 마찬가지다. 팀 간에 기술 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묻혀버리기도 한다. 똑같은 시행착오가 팀별로 반복되기도 한다. 김동건 넥슨 데브캣스튜디오 본부장은 "사내 정보 공유 제도는 시장의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원 개개인의 아이디어를 사내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선순환 생태계가 다양성 기른다

EA 소니 등 글로벌 게임회사들은 대학생이나 중소 게임업체로부터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는 데 적극적이다. 대학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IGF 라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에서 상위권에 오른 게임들은 이들의 표적이 된다. 투자는 물론 퍼블리싱(게임 배급 및 판매)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미국 게임업체들이 최근 대학들과의 산학협력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젊은 대학생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국내 게임회사들은 최근에야 게임 생태계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다.

NHN은 100억원을 투자해 온라인 게임 장터 '아이두게임'을 개설할 예정이다. 게임 개발 기술 등을 공개해 누구나 쉽게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일반인들이 직접 만든 게임을 이곳에서 자유롭게 서비스할 수 있게 된다. 애플의 앱스토어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대학생이나 게임개발자 등이 비용 부담 없이 창작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게이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직접 만드는 환경이 갖춰지면 참신하고 기발한 게임들이 양산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수많은 중소 개발사들이 큰 비용 부담 없이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생태계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며 "온라인게임 분야에서 한국이 계속 강자로 남기 위해서라도 정부나 대형 게임회사들이 생태계 조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족한 인재 육성이 관건

세계 최대 게임업체인 미국 EA나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등에는 MIT 등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도들이 즐비하다. 일본에서는 게임 개발자가 인기 직종이다. 취업률이 20%에 불과한 데도 게임 개발자가 되기 위해 매년 수천명이 게임전문학교에 들어가고 있다. 일본 중견 게임 개발사인 뱅가드의 토모노리 스기야마 사장은 "도쿄대 등 일류 대학을 나오고도 게임 개발자가 되려고 전문학교에 가는 경우도 흔하다"며 "실무 수준의 게임 개발 교육을 받은 게임 개발자들의 층이 두텁다는 게 일본의 자랑"이라고 했다.

한국은 딴판이다. 일부 대학에 게임학과가 개설돼 있지만 배출 인력은 턱없이 모자라는 실정이다. 인터넷과 결합된 온라인게임의 특성상 컴퓨터공학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많지만 게임 회사에 입사하려는 컴퓨터공학도를 찾기는 쉽지 않다.

김강석 블루홀스튜디오 사장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이 겹쳐 우수 인력들이 게임 회사를 기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상원 네오위즈게임즈 부사장은 "영화 '매트릭스'를 만든 아트 디렉터가 EA의 신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널려 있는 미국의 현실이 부럽다"며 "가뭄에 콩나듯 하는 인재까지 외국에 빼앗기는 상황에선 좋은 게임 개발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