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불황…藥도 안팔린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 상가 2층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김경은씨(42 · 가명)는 얼마 전 망신을 당했다. 처방전을 갖고 온 손님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파트 상가 관리 직원이 "밀린 관리비를 끝내 내지 않으면 전기를 끊겠다"고 최후통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매출이 줄면서 관리비 납부가 늦어졌다"며 "최근 1층에 약국이 하나 더 생긴 뒤부터는 손님이 가물에 콩 나듯 올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이젠 약사(藥師)가 아니라 '약 사'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약이 안 팔리고 있다. 식비나 옷값을 줄인 뒤 맨 마지막에나 줄인다는 것이 약값.그러나 최근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위축된 소비심리가 약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대표적인 약국 거리인 서울 종로 5가는 물론 부유층 주거지로 알려진 서울 강남 약국 매출까지 지역에 관계없이 작년 이맘때보다 평균 30%가량 줄었다. 경기도 의정부의 한 약국 약사는 "아파도 참는 건지,아니면 갑자기 건강해진 건지 처방전을 들고 오는 환자 수도 10~30% 감소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처방된 약의 가짓수를 줄이거나 가격대를 낮추는 '다이어트 구매'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약품이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환자가 처방전에 표시된 약 중에서 비급여 약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 경우 약사는 의사와 통화를 하거나 아니면 환자가 다시 처방전을 받아온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약품이라면 환자가 약값의 30%만 내면 되지만 비적용 품목은 전액 환자 부담인 탓이다.

'내 돈'이 드는 종합감기약 소화제 진통제 등도 판매가 지난해 이맘때보다 20~30% 줄었다는 것이 약사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종로의 한 약국 관계자는 "감기 증세를 호소하는 손님들에게 두 가지 정도의 물약이나 알약을 주고 3000~4000원을 부르면 약 한 가지를 빼달라고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며 "약값을 아끼기위해 3일분을 하루분으로 줄여달라는 환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치료가 목적인 약들은 그나마 팔리는 편이지만 영양제 등 먹지 않아도 건강에는 당장 이상이 없는 '웰빙'약들은 매출이 50%에서 80%까지 줄었다. 약국에서 한꺼번에 6개월치 영양제를 샀던 손님들이 이젠 3개월치를 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발기부전치료제 같은 일종의 '해피 드러그'도 시들하긴 마찬가지.강남구 대치동의 한 약사는 "지난해 연말에 반짝 떴다가 최근 찾는 고객이 부쩍 줄었다"며 "특히 60~70대보다 40~50대 손님들이 많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제약업체들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일반약 매출 비중이 높은 국내 한 제약회사 관계자는 "(리베이트 등에 대한) 단속이 심해져 약국 영업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기존 제품에 성분 한두 가지를 더 넣어 제품을 리뉴얼하거나 건강기능식품을 아웃소싱해 유통시키는 방법 등 다양한 매출 증대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봉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영양제는 경기에 민감한 품목이지만 감기약 소화제 등 치료에 필요한 약은 경기에 상대적으로 둔감하게 반응한다"며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필수적인 약의 소비가 줄어든 것은 경제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관우/강유현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