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추석, 유자효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태헌의 漢譯]


秋夕(추석)



忽憶幼年多羞慙(홀억유년다수참)


齒算五十難成眠(치산오십난성면)


雙親駕鶴遠逝日(쌍친가학원서일)


不肖孤兒省事前(불초고아성사전)



深夜盤桓待家豚(심야반환대가돈)


月光緩撫半白髮(월광완무반백발)


有餘玉顔恕萬事(유여옥안서만사)


嗚呼時卽仲秋節(오호시즉중추절)



[주석]


* 秋夕(추석) : 추석, 중추절(仲秋節).


忽(홀) : 문득, 갑자기. / 憶幼年(억유년) : 어린 시절을 생각하다. / 多羞慙(다수참) : 부끄러움이 많다. ‘羞慙’은 두 글자 모두 부끄럽다는 뜻이다.


齒算(치산) : 나이. / 五十(오십) : 50, 쉰. / 難成眠(난성면) : 잠을 이루기 어렵다.


雙親(쌍친) : 양친(兩親), 부모님. / 駕鶴遠逝(가학원서) : 학을 타고 멀리 가다. 세상을 떠나는 것을 완곡하게 이른 말이다. / 日(일) : ~한 날.


不肖孤兒(불초고아) : ‘불초’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으로, 주로 아들이 부모에게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로 쓰인다. ‘고아’는 보통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를 일컫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어버이를 잃은 아들이 스스로를 칭하던 말이기도 하다. 이 한역시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 省事(성사) : 사리를 분별하다, 철들다. / 前(전) : ~전, ~앞.


深夜(심야) : 깊은 밤. / 盤桓(반환) : 서성거리다, 머뭇거리다. / 待(대) : ~을 기다리다. / 家豚(가돈) : 미련한 아들이란 뜻으로, 남에게 자기 아들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月光(월광) : 달빛. / 緩撫(완무) : 부드럽게 쓰다듬다. / 半白髮(반백발) : 반백의 머리칼.


有餘(유여) : 여유가 있다, 넉넉하다. / 玉顔(옥안) : 옥과 같은 얼굴. 보통은 미녀의 얼굴을 지칭하나 여기서는 둥근 달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恕(서) : ~을 용서하다. / 萬事(만사) : 여러 가지 일, 모든 것.


嗚呼(오호) : (감탄사) 아! / 時卽(시즉) : 때는 (곧) ~이다. / 仲秋節(중추절) : 추석.



[직역]


추석



문득 어린 시절 생각하면 부끄럼 많아


나이 쉰이 되어도 잠 이루기 어렵네


양친께서 학 타고 멀리 떠나신 날은


못난 이 몸이 철들기도 전이었네



깊은 밤에 서성이며 아들 기다리자니


달빛은 부드럽게 반백의 머리 쓰다듬고


넉넉한 얼굴로 모든 것 용서하나니


아! 때는 바로 추석이구나



[한역 노트]


부모에 대한 자식의 마음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한 화면에 투사(投射)한 이 시의 주지(主旨)는,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 부모님께 철없이 굴었던 어리석음에 대해 추석을 맞이하여 “용서”를 빌고 싶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다 떠나보내고 쉰 고개를 넘은 자식 된 자의 죄스러운 마음이 어디 시인 한 사람에게만 그치는 것일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추석이나 정월대보름은 하늘에 밝은 달이 떠있어 달을 보며 이것저것 비는 것이 많아지는 날이기도 하다. 역자는 여태 살면서 설날에 자기 소원을 비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른이든 아이든 상대방의 복을 비는 덕담을 들려주는 일은 있어도, 자기 복을 비는 일이 없는 것은 어쩌면 설날에는 쳐다볼 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석에 달을 보며 비는 것과 관련하여 역자는 두어 해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더랬다.



仲秋夜(중추야)


風淸蟲詠仲秋宵(풍청충영중추소)


對月何人不合掌(대월하인불합장)


地上祈求固大多(지상기구고대다)


姮娥此夜頭疼痒(항아차야두동양)



추석날 밤에


바람 맑고 벌레 노래하는 추석날 밤


달 대하고 누군들 손 모으지 않으랴!


지상에서의 기도가 정말 크고도 많아


항아가 이 밤에는 머리 지끈거리리라



항아는 옛사람들이 만들어둔 달의 신(神) 이름이다. 지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항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명절이 오히려 두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제 평월(平月)에 조금씩 달의 신에게 소원을 빌고, 추석이나 정월대보름에는 너무 많은 것을 빌지 말도록 하자. 명절의 항아도 항아이고 평월의 항아도 항아일 것이므로…… 그리고 항아도 명절에는 좀 쉬어야지 않겠는가!


5연 10행으로 구성된 유자효 시인의 이 시를 역자는 4구로 이루어진 칠언고시(七言古詩) 두 수(首)로 재구성하였다. 두 수 모두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眠(면)’과 ‘前(전)’, ‘髮(발)’과 ‘節(절)’이다.


2019. 9. 10.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