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의 미국남자프로골프(PGA)투어 도전으로 그동안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여장부' 미드레드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스의 역동적인 삶이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 195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자하리스는 한마디로 만능 스포츠우먼이자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꾼이었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여성 운동 선수라는 찬사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세상을 뜬지 47년만에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바로 그녀가 사상 최초로 남성들의 철옹성인 미국남자프로골프(PGA) 투어에 도전했던 첫번째 여성이었기 때문. 자하리스는 지난 1945년 PGA 투어 로스앤젤레스오픈(현재 닛산오픈)에 출전, 당당히 컷을 통과했다. 세계 스포츠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계기는 PGA 투어 도전이었지만 자하리스는 사실 금녀(禁女)의 문을 두드린 것 말고도 스포츠 우먼으로서 남긴 자취가 만만치 않다. 본명보다 더 많이 알려진 '베이브'라는 별명이 어릴 때 동네 남자 친구들이 야구를 함께 하면서 당대 최고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같다고 붙여준 것이라는 사실에서그녀의 예사롭지 않는 인생을 엿볼 수 있다. 소녀 시절부터 남자들과 어울려 야구와 테니스, 다이빙, 롤러스케이트, 볼링 등을 즐기던 자하리스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육상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딴 것으로 화려한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취미 삼아 운동을 하던 자하리스가 '작심하고' 뛰어든 분야는 골프였다. 21세 때 골프에 입문한 자하리스는 암으로 요절할 때까지 무려 82승을 거뒀고이 가운데 10차례 메이저대회를 제패하는 등 한마디로 '지존'이었다. 1946년부터 이듬해까지 17차례 아마추어대회를 잇따라 우승했고 이 가운데는 브리티시여자아마추어챔피언십도 포함되어 있다. 사망하기 3년전인 1953년 암수술을 받고도 다음해 LPGA 투어에 복귀, US여자오픈을 비롯한 5개 대회 우승컵을 휩쓰는 불굴의 투지를 보이기도 했다. AP가 선정하는 '올해의 최우수 여자 선수상'을 6차례나 차지했고 역시 AP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우먼'도 자하리스의 몫이었다. 쾌활하고 거리낌없는 성격의 자하리스는 대회가 시작되면 항상 "자, 내가 왔다. 누가 2등 할거지?'라면서 참가 선수들의 기를 죽이곤 했다.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으나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동료선수들과 갤러리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 자하리스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하리스의 삶에 커다란 강조점이 된 것은 물론 PGA 투어 대회 출전. 1945년 로스앤젤레스오픈 출전이 첫 도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자하리스는 1938년 이 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출전 신청서를 냈더니 나오라고 했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출전했던 자하리스는 컷오프의 아픔을 겪었지만 함께 경기를 펼쳤던 프로레슬러 조지 자하리스를평생 반려자로 얻는 '소득'을 올렸다. 경기가 끝나고 한달 뒤 결혼식을 올린 자하리스는 이제까지 쓰던 밀드레드 '베이브' 디드릭슨이라는 이름에 '자하리스'라는 새로운 성(姓)을 추가했다. 당시 컷오프의 '망신'을 만회하고자 1944년 로스앤젤레스오픈 예선에 나섰지만고배를 마셨다. 포기할 줄 모르는 자하리스는 이듬해 다시 남편과 함께 예선에 도전, 마침내 출전권을 따내며 골프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썼다. 남편 조지는 물론 낙방했다.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만큼 강건했던 자하리스는 그러나 예기치 않게 찾아온 병마에 결국 무릎을 꿇었지만 그녀의 고향 텍사스주 버몬트에는 자하리스기념관이 세워져 '텍사스 선머슴'이고 불렸던 자하리스를 추모하고 있다. 자하리스기념관 W.L 페이트 관장은 "자하리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그녀가 살아 생전 해냈던 업적은 정말 대단했다"며 "그녀는 여성으로서 뛰어난 운동선수에 그치지 않은 진정한 스포츠맨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권 훈기자 kh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