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강제노역 '시효문제' 혼전 지속…대법원서 결론날 듯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가해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들과 유족의 발목을 잡은 '소멸시효' 문제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8일 강제노역 피해자 정모 씨의 유족들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면서 소멸시효 만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민법은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이를 행사하지 않으면 권리가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기간이 '소멸시효'다.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혹은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강제노역 사건은 70여년이 지났지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한 '장애 사유'가 명백해 불법행위 후 10년 요건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애 사유가 해소된 시점부터 3년 이내까지 청구권이 인정된다.

하지만 장애 사유가 해소된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재판 결과가 엇갈리고 있다.

하급심에서 이처럼 혼선을 빚고 있는 주된 원인은 대법원 판례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日강제노역 '시효문제' 혼전 지속…대법원서 결론날 듯
최근 상반된 판결로 논란이 된 강제노역 손해배상 시효 문제의 발단은 2018년 13년만에 피해자들에게 첫 승리를 안겨다 준 일본제철 상대 손해배상 소송이다.

2005년 강제노역 피해자 4명이 처음 일본제철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이 소송은 하급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으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이후 6년이 지난 2018년 10월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원고 승소 확정 판결을 내리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확정 판결 이후 유사한 강제노역 손해배상 소송이 줄을 이었다.

후속 소송의 승패를 결정짓는 주된 쟁점 중 하나가 청구권 소멸시효인데, 그 기준은 손해배상 청구를 막았던 장애 사유의 해소 유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재판부는 대법원의 2012년 5월 판결을 기준으로 잡았다.

이 대법 판결이 후속 재판에 대한 기속력을 가졌다고 보고 이때를 장애 사유의 해소 시점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 제기된 소송은 소멸시효가 만료된 것으로 간주해 지난달 11일 미쓰비시 매터리얼(전 미쓰비시광업) 재판과 이날 일본제철 상대 재판에서 연이어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반면 광주고법 민사2부(최인규 부장판사)는 2018년 12월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손배소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대법 판결이 확정된 2018년 10월 장애 사유가 해소된 걸로 보고 이때부터 3년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소멸시효의 시작점을 언제로 볼지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 재판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달 미쓰비시 매터리얼 1심 재판에서 패소한 피해자 유족들은 항소를 포기해 패소 판결이 확정됐다.

이미 승소가 확정된 강제노역 사건도 일본 기업들로부터 실제 배상을 받아내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최근 미쓰비시가 국내 기업과 거래한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달 초 법원에서 채권압류·추심명령을 받아냈지만, 이후 해당 기업이 미쓰비시와 거래 내역이 없던 것으로 확인돼 압류신청을 취하했다.

이밖에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최대 규모의 강제노역 소송은 지난 6월 1심에서 개개인의 피해자에게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각하'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대법원이 추가적인 판결로 세부 기준을 세울 때까지 강제노역 재판을 둘러싼 혼란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