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방식도 바꿔…보고·회의 줄이고 자율좌석제 운용도
기업들, 보완입법 요구…'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문제도 못 풀어
[주52시간 1년] ② 기업들 근로시간 관리 강화…집중근무시간 등 도입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매일 접속하는 인사시스템에는 근무시간이 기본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설정돼 있다.

직원들은 '핵심근무시간'인 이 시간대를 포함해 실제 자신이 근무한 시간을 매일 입력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40시간 근무를 채우기만 하면 출퇴근 시간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이처럼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한 현대차가 특정 시간대를 정해 의무적으로 일하도록 한 것은 자동차 개발과 상품 전략 수립 등에 부서 간 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 부서에 협조전을 보내거나, 여러 부서가 참여하는 회의 등은 핵심근무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종전보다 높여야 하는 기업들은 현대차처럼 근로시간 관리를 강화하면서 주 52시간제에 대응하고 있다.

기업들은 또 보고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자율좌석제를 도입하는 등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주 52시간 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주요 대기업들은 지난 1년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바뀐 제도를 지켜왔지만, 사용자단체들은 여전히 보완입법의 미비로 기업들이 범법자로 내몰릴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대기업, '집중근무제·협업시간제' 등 근무시간 관리 강화
29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대기업 144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근무시간 관리제도'(68.8%)를 가장 많이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 관리제의 대표적 유형은 현대차와 같은 협업시간제와 집중근무시간제다.

협업시간제는 시차출퇴근 등 유연근무제에 따라 직원 간 근무시간이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해 회의나 업무요청, 면담 등 부서 간 협업이 필요한 업무를 집중적으로 하는 제도다.

또 집중근무시간제는 특정 시간대를 정해 사적인 대화나 전화통화, 회의 등을 하지 않고 업무에 몰입하는 방식이다.

[주52시간 1년] ② 기업들 근로시간 관리 강화…집중근무시간 등 도입

아울러 기업들은 지난해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이후 제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으로 근로시간 관리 강화(53.5%)와 유연근무제 확대(41.0%)를 복수응답으로 답했다.

특히 조사대상 기업의 과반(56.3%)이 유연근무제를 실시한다고 답했고, 유연근무제 유형은 탄력적 근로시간제(66.7%), 시차출퇴근제(51.9%), 선택적 근로시간제(44.4%) 등의 순(복수응답)이었다.

이처럼 주요 대기업은 직원들의 근무시간이 줄어들자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근로시간 관리를 강화하는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다.

또한, 'PC 오프제'나 '사무실 소등' 등 강제적 수단도 삼성과 현대차, SK, LG, 롯데, GS, 두산 등 주요 그룹 계열사에서는 보편화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근무시간이 주 52시간을 넘기는 '그림자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말 주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되는 대·중견기업 317개사를 조사한 결과 4곳 중 1곳은 초과근로를 해소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대기업들은 주 52시간을 초과한 근무시간은 입력되지 않도록 전산시스템을 설정해 공식적으로는 위법 사례가 없지만, 실제로는 야근을 하거나 일찍 출근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모 대기업 직원은 "월말 결산 등 일이 많아 아침 7시까지 출근해도 출근시간은 오전 8시부터 입력할 수 있어 전산상의 근무시간과 실제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 '일하는 방식' 바꿔 업무효율 높인다…"회의·보고 줄여라"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들의 일하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한경연에 따르면 줄어든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보고와 결재 등 업무처리가 가능한 모바일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전자결재시스템을 개편한 기업은 56.3%로 절반이 넘었다.

또 보고자료 간소화, 회의 자제 등 회의문화를 개편했다는 기업도 52.1%에 달했다.

보고문화 개선 사례는 미국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최고경영자(CEO)가 선언한 'PPT(파워포인트) 제로'가 대표적이다.

PPT 대신 '서술형 보고서'를 쓰도록 한 것이다.

[주52시간 1년] ② 기업들 근로시간 관리 강화…집중근무시간 등 도입

국내에서는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이 PPT 금지의 선구자다.

정 부회장은 2016년 PPT 대신 수기나 간단한 엑셀을 쓰도록 했더니 보고서 분량과 회의 시간이 짧아져 논의가 핵심에 집중된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두산그룹 박정원 회장도 지난해 PPT 보고를 자제하도록 하는 보고문화 개선에 동참했고, KB국민은행 등 여러 기업에서 'PPT 제로'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직접 상사의 자리에 찾아가는 대면 보고나 회의 소집도 이메일이나 모바일 메신저 등으로 대체하는 추세다.

SK그룹은 본사격인 SK서린빌딩을 비롯해 주요 관계사 사옥을 리모델링해 사무실에 지정석을 없앴다.

여러 부서가 한 층에 뒤섞여 앉고, 매일 자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면 보고가 사라졌다.

SK그룹 관계자는 "팀장이 팀원들이 어디에 앉았는지는 알 수는 있지만, 자리로 불러 업무지시를 하는 사례는 거의 없어졌다"며 "시행 초기에 어색함이 있었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현대모비스 역시 이달 초 일부 층을 개조해 소프트웨어개발 부문과 경영지원 관련 부서를 대상으로 자율좌석제를 실시했다.

한경연 조사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공유좌석제 등 근무환경 유연화를 도입했다는 기업은 24.3%에 이른다.

이밖에 현대차 등 일부 기업은 구내식당의 저녁 식사 제공을 중단하거나,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대신 대리운전업체와 계약을 체결하는 등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의 관행들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 재계, '탄력근로 단위기간 확대' 등 보완입법 요구
재계는 근로시간 단축에 적응해 나가면서도 생산성 저하를 우려하며 보완입법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탄력근로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처럼 1년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이들 사용자단체는 전자나 반도체, 바이오, 게임 등의 업계는 경쟁력의 핵심인 신제품 개발과 연구개발(R&D) 업무에 3개월 이상의 집중 근무가 필요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단위기간을 6개월로 연장하기로 합의했지만, 민주노총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도 정당 간 입장이 달라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여전히 계류 중인 상태다.

재계의 핵심 요구 사항인 탄력근로제 확대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다른 입법보완 요구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재계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는 방안과 전문직 근로자에게 업무수행 방식에 재량권을 주기 위해 도입한 '재량근로시간제'의 적용대상을 확대하는 방안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주52시간 1년] ② 기업들 근로시간 관리 강화…집중근무시간 등 도입

다만,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게임업계의 근무 분위기도 많이 바뀌고 있다.

이전까지는 게임산업의 특성상 신작 출시를 앞두고는 개발 등 관련 업무가 극도로 집중되다 보니 초과 근무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에 한때 몇몇 업체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해서 '등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탄력 근로제 도입과 인력충원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도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직원들 만족도가 높아지고 근무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며 "업데이트 때도 부득불 새벽에 일찍 출근하게 되면 일찍 퇴근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중소 게임업체들은 애로를 호소하고 있다.

한 중견 게임업체의 관계자는 "대개 게임 출시 직전에 최소 3~4개월은 집중적으로 업무가 몰린다"며 "근무 시간을 칼같이 끊어서 운영하기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내년 1월 30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중소기업단체들은 탄력근로 단위기간을 1년으로 확대하고, 최소 1년의 계도기간을 달라는 요청을 지속해서 제기하고 있다.

소속 회원사 대부분이 300인 미만인 대한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중소사업자 대부분이 내년부터 시행될 주 52시간제에 대응 자체를 하지 못하고 손놓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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