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자신의 인사청문회 관련 자료가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degaussing)’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컴퓨터 디가우징이 ‘증거인멸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 와중이라 파장이 예상된다. 양 전 대법관의 디가우징은 관행에 따른 것이지만 김 대법원장의 디가우징은 법적 근거가 더 취약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 대법원장의 ‘셀프 디가우징’ 논란

디가우징 장비
디가우징 장비
27일 대법원 관계자는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청문회 준비팀에서 사용한 컴퓨터 4대의 하드디스크가 지난해 9월 인사청문회 직후 디가우징됐다”고 말했다.

‘양승태 디가우징’과 ‘김명수 디가우징’은 기본적으로 같은 사안이다.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30조에 따라 사용할 수 없는 사유가 발생한 것이 디가우징 배경이다.

30조는 불용품 처리 절차를 따라야 하는 물품을 ‘사용불능 상태가 되거나 훼손 또는 마모되어 수리하여도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로 정하고 있다. 대법관이 썼던 컴퓨터에 대한 처리 규정은 없지만 대법원은 관행적으로 디가우징해왔다.

‘양승태 디가우징’은 퇴직 후 행정처 주도로 이뤄진 반면 ‘김명수 디가우징’은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논쟁적이다. 법원 내부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이 4대 모두 디가우징할 것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김 대법원장의 디가우징이 법적 근거 측면에서 더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인사청문회 준비팀은 법원 바깥에 꾸려지고, 많은 의혹을 포함해 청문회 통과를 위한 여러 전략 자료를 정리한다. 인사청문회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법조계 관계자는 “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의원과의 지연·학연·혈연을 총동원하곤 한다”고 전했다. 그는 “청문회 자료 자체가 대법원장과 관련된 중요 기록물”이라며 “이 자료를 취임 직후 디가우징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퇴임 후에 관련 디가우징 작업을 하거나 디가우징 없이 포맷 등의 간단한 조치를 거쳐 재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설명이다. 김 대법원장은 양 전 대법원장의 디가우징 논란이 불거진 뒤 입을 닫고 있다.
김명수 인사청문 자료도 '셀프 디가우징' 드러나
◆“디가우징은 공공기록물 관리법 위반”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는 김 대법원장 임기가 시작된 이후인 지난해 10월31일 디가우징됐다. 당시 법원 내에서는 디가우징 작업에 반대한 목소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이 관행에 따라 디가우징 작업을 했고, 김 대법원장은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았다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디가우징을 직접 지시한 게 아니기 때문에 증거인멸 등의 혐의 적용은 힘들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디가우징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온다. 공공기록물 관리법 위반이라는 문제 제기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는 “공무용 컴퓨터를 디가우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무엇이냐”고 페이스북을 통해 지적했다. 그는 “법원 공공기록물 관련 법규를 보면 공공기록물은 검토자료까지도 그 범위에 포함되고 사적 처분이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관행적으로 해왔다는 대법원의 해명은 월권을 자백하는 꼴”이라며 “김 대법원장의 인사청문회 기록 삭제에 대한 문제 소지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