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浦項)이라는 지명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지점을 뜻하는 순우리말 갯미기(표준말은 갯목)가 ‘개울 포(浦)’와 ‘목 항(項)’으로 한자화한 것이다. 포항이라는 이름이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조선 영조 때인 1731년. 당시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쌀을 저장해두는 창진(倉鎭)을 건설하면서 포항창진으로 이름붙인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한민국 도시 이야기-포항] 일제강점기 '물반 청어반' 소문난 항구…6·25전쟁 폐허 딛고 포항제철로 '우뚝'
1930년대 형산강과 영일만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포항은 조선시대 때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포항의 입지는 더욱 강화됐다. 일제는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영일만과 형산강을 매립해 포항을 동해안의 대표적 항구도시로 조성했다. 당시 일제가 포항에서 수탈한 대표적인 수산물이 청어다. 일제강점기 때 영일만은 ‘물 반 청어 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어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다. 지금도 호미곶 구만리에는 까꾸리개(鉤浦)라는 이름의 해안이 있다. 풍랑이 심한 날 해안가로 밀려온 청어 떼를 까꾸리(갈퀴의 방언)로 쓸어 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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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포항은 6·25전쟁 때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됐다. 전쟁 발발 직후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했던 UN군과 한국군은 영일만 전투의 승리에 힘입어 북진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도 영일만에는 해병대 1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1970년대 전쟁 후 폐허가 된 포항은 영일만이 가진 입지조건을 기반으로 부활한다. 1967년 포항제철소(현 포스코) 건설 부지로 선정되기 전만 해도 포항은 인구 6만7000명의 작은 도시였다. 포항 남구 송정동과 동촌동 일대 영일만의 모래사장에 대규모 제철소가 지어지면서 인근에 도로와 항만도 잇달아 건설됐다. 포항제철 직원을 위한 숙소가 지어진 지곡동 일대는 포항제철의 성장과 함께 포항의 부촌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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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1995년 민선 지방자치 시대 출범을 앞두고 포항시와 영일군이 합쳐져 인구 52만명에 이르는 경북 최대의 산업도시로 발돋움했다.

포항=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