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조급증'·노동계 '무책임·조직 이기주의' 비판 목소리
노사정위 '태만' 지적도…"모두 한 발짝씩 양보해야"


19일 한국노총이 대타협 파기 및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17년 만에 성사됐던 '9·15 노사정 대타협'이 파탄 날 위기에 처했다.

이날 김대환 노사정위원장,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등 노사정위 대표들은 차례로 기자회견을 열어, 대타협 파탄의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노사정이 합의를 이뤘다가 그 합의를 무산시키는 것도 노사정위 18년 역사상 처음이지만, 이들 대표가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연 것도 처음이다.

노사정 대표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쁜 모습이었지만, 외부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노사정 대타협은 노사정 참여 주체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 "정부 조급한 노동개혁 추진" 비판론…"충실히 협의했다" 반박
우선 정부의 조급한 노동개혁 추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사정 대타협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은 '일반해고' 및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양대 지침이었다.

양대 지침으로 인해 지난해 4월 한노총이 대화 결렬을 선언했고, 그 갈등을 겨우 봉합하면서 대타협을 이룰 수 있었다.

대타협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한노총 산하 산별노조들을 달래기 위해 김동만 위원장은 9월 대타협 직전 개최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내 양대 지침 논의는 결코 없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으로 김 위원장은 내부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노사정은 양대 지침 논의를 올해 1월 7일 처음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이러한 합의에도 지난해 12월 양대 지침 초안을 발표할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당황한 것은 김동만 위원장이었다.

한노총 관계자는 "김동만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수차례 전화를 해 이기권 장관에게 '12월은 절대 안 된다.

1월부터 시작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고용부가 12월 30일 전문가 토론회에서 양대 지침 초안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김동만 위원장은 이기권 장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노사정 파탄 선언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부의 '조급증'은 김대환 노사정위원장도 인정한다.

김대환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양대 지침을 노동개혁의 핵심 사안으로 부각시켜 노동계는 '쉬운 해고'라는 과도한 우려를 갖게 됐고, 재계는 과도한 기대를 갖게 됐다"며 "정부의 양대 지침 추진 과정에서도 다소 조급한 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기권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12월 초부터 수차례 한노총에 협의를 제안했다"며 "지난해 12월 30일 전문가 토론회 등은 정상적인 지침 준비 과정으로, 이를 일방적 발표라고 호도하면서 협의에는 전혀 응하지 않는 한노총의 행태가 대타협 위반"이라고 반박했다.

◇ 한노총 '무책임' 비판 목소리…조직 이기주의 비판도
한노총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강하게 들린다.

노사정의 주체로서 책임을 다했느냐는 지적이다.

김동만 위원장은 지난해 9월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한 이유를 "우리 사회와 경제가 어려워지고 116만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국내외 경기둔화와 청년실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국내외 경기는 둔화를 넘어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조선, 철강, 기계, 금융 등 각 산업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청년실업은 해결은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이처럼 노사정 대타협의 배경으로 작용했던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이 전혀 해결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와의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노사정 대타협 파탄'을 선언하면 이를 국민이 받아들이겠느냐는 지적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노동운동을 펼치면서 비정규직 근로자와 청년실업자를 외면한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며 "노사정위 불참까지 선언하면 이러한 비판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노총은 올해 정부의 노동단체 지원사업 예산에서 20억원 가량을 지원받고, 여주 중앙교육원 리모델링에 14억원 등 모두 34억원 가량을 지원받을 전망이다.

이는 엄연히 국민의 '혈세'에서 지원되는 예산이다.

이러한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노사정위에 불참해 노동개혁 논의를 외면한다면 여론은 한노총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노총 내부의 조직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기권 장관은 "한노총의 이번 결정은 대타협 정신보다 공공, 금융, 금속, 화학 등 일부 연맹의 조직 이기주의를 우선시한 것"이라며 "이들의 노동개혁 반대와 지도부 흔들기의 실제 목적은 공공·금융부문 성과연봉제 확대, 임금체계 개편 등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속(13만명), 화학(8만명), 공공(7만명), 금융노조(10만명)의 조합원 수를 합치면 한노총 전체 조합원 수 84만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들이 노사정 파기를 주도했다는 얘기다.

자동차노련, 항운노련, 해상노련 등 한노총 내부에 대타협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지만, 이들의 의견 강경 노조의 목소리에 묻혀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연구한 한 노동 전문가는 "한노총의 정책 방향은 결국 이들 주축 산별노조들이 주도한다"며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국민 여론을 수렴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노사정위도 '직무 태만' 거론…"모두 한 발짝씩 양보해야"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의 '직무 태만'도 거론된다.

김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와 노동계 간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 위원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 말 정부의 양대 지침 초안 발표 후 한노총이 대타협 파기를 위협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 정부와 노동계의 갈등이 한창일 때 김 위원장의 중재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노총은 "김대환 위원장이 만약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김 위원장이 한 일이라고는 국제기구 등을 돌아다니며 대타협 홍보에 열을 올린 것 뿐이다"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사정 공익위원은 "지금의 노사정 대타협의 위기는 노사정 대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며 "노사정 모두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한발짝씩 물러나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안승섭 기자 ss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