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업체에 다니는 박 대리는 얼마 전 회사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한 실수 때문에 두고 두고 후회 중이다. 그는 말 없이 몸짓만으로 단어를 설명하면 상대가 알아맞히는 ‘몸짓 스피드 게임’에 답을 맞히는 역할로 출전했다. 박 대리 팀에 주어진 단어는 ‘대머리 독수리’. 박 대리의 동료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모습을 흉내내기 위해 손으로 두상을 몇 번 쓸어넘긴 후 반짝반짝 빛난다는 듯이 손을 잘게 흔들었다.

박 대리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것은 얼마 전 가발을 맞춘 옆 부서 정 부장. ‘회사 사람 이름 맞히기구나’라고 확신한 박 대리는 큰 소리로 “정×× 부장님”! 이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폭소가 ‘빵’ 터졌으나, 유일하게 쓴 웃음으로 박 대리를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물론 정 부장이었다. 그 일 이후로 박 대리는 ‘용자’(용기 있는 자)란 별명을 얻었지만, 막상 회사에선 정 부장을 피해다니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고….

5월에는 체육대회, MT, 야유회, 워크숍 등 직장 내 연례 행사가 많은 때다. 지루한 회사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곤욕을 치르거나 힘든 업무의 연장이 되기도 한다. 직장 내 행사에 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어본다.

○부장님의 뒤끝 작렬

식품회사 강 대리는 다부진 체격에 힘도 좋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얼마 전 열린 회사 체육대회에서도 그는 주변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씨름 종목에 팀 대표로 출전했다. 타고난 운동신경 덕에 결승까지는 무난히 올라갔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옆팀 김 부장이었다. 김 부장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체격이 좋은 편이었고 학창시절엔 씨름 학교 대표까지 했던 시쳇말로 ‘왕년에 한가락’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승부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싱겁게 끝나버렸다. 강 대리가 젊은 기세로 김 부장을 번쩍 들어 땅에 내팽개친 것. 그대로 고꾸라진 김 부장은 남은 두 판도 잇따라 패하며 강 대리에게 우승을 내줬고, 강 대리는 기뻐하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김 부장이 강 대리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괜히 시비를 걸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강 대리가 칼퇴근하는 날이면 트집을 잡아 회사에 어떻게든 남게 한다. 강 대리는 요즘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눈치 없이 이겼나 보네. 져 드릴 걸 그랬어….”

○감놔라, 대추놔라

A기업 자재팀에 새로 부임한 박 팀장은 초임 부서장으로서의 각오에 불타고 있었다. 팀의 단합을 위한 첫 워크숍에서 박 팀장은 자신의 ‘민주적인 마인드’를 만방에 알릴 생각에 들떠 있었다. ‘워크숍 준비위원회’를 3주 전부터 발족시키고 차석인 최 차장을 위원장에 앉혀 모든 것을 일임했다. 자신은 빠져 있을 테니 ‘아래서부터의 워크숍’을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시’보다 무서운 ‘참견’이 복병이었다. “최 차장, 다 좋은데 말이야 횡성이라고 뻔한 한우식당 가는 것보단 산채정식 쪽이 어때?” “아무래도 게임은 축구가 대표성이 있지 않겠어? 재고해보지 그래?” “저녁 프로그램에 곁들일 술 종류 말이야, 지난번에 한산소곡주 마셔보니까 좋더라, 그거 한번 알아봐.”

이런 식의 지시가 1주일에 두세 건씩 쌓이다보니 결국 ‘준비위’는 무력화되고 말았다. 박 팀장의 전 부서인 총무팀의 한 직원은 워크숍 전날 자재팀을 방문, 계획표를 보고는 “완전히 박 팀장님 스타일로 A부터 Z까지 세팅하셨네요. 능력 좋으십니다.” 이 직원의 빈정거리는 한 마디에 최 차장은 앞으로 다가올 박 팀장과의 일상을 직감하게 됐다.

○‘술만 마시는 워크숍’ 싫어서 바꿨더니…

PR 컨설팅 회사인 C사는 얼마 전 가평으로 MT를 다녀왔다. 이번 MT의 컨셉트는 ‘술과 산행’을 탈피해보자는 취지로 TV프로그램을 모방한 ‘서바이벌 1박2일’로 꾸며졌다. 비상금과 교통비만 지급한 뒤 제비뽑기에서 나온 미션을 모두 수행하고 가평역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팀이 이기는 것이다. 팀은 버스팀과 기차팀으로 나눴고, ‘1일 휴가권’이 경품으로 걸렸다.

유 대리가 속한 기차팀은 ‘2002월드컵 열정의 진원지 서울 OOOOO에서 점프샷 찍기’란 미션을 뽑아든 뒤 ‘광화문 광장’에서 단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인증샷을 찍었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선 “이렇게 재미 있는 회사 MT는 처음”이란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이 떨어진 팀장급 이상의 어르신들. 버스와 기차에 시달렸는지 이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을 꺼내고 방바닥에서 그대로 전사해버렸다. 어르신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온 한 마디. “우린 힘들어서 이런 MT는 못하겠다. 다음부턴 그냥 원래대로 버스 대절해서 등산하고 술 먹고 하자.”

○사내 ‘연애인’들에겐 프러포즈 기회

워크숍이나 체육대회는 사내 연애를 하는 김 과장, 이 대리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동료들 눈을 피해 1년 넘게 사내 연애를 했던 한 증권사의 김모 대리. 언제 프러포즈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사내 페스티벌 때 깜짝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총무부를 설득한 끝에 행사가 끝나는 오후 6시에 시간을 받았고, 그는 한 달 넘게 감동의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마침내 행사 당일 오후 6시, 김 대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외쳤는데….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장에 있던 2000여명의 직원들이 모두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이곳저곳을 찾기 시작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녀는 몸이 피곤해 버스에서 몰래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준비한 이벤트는 못 보여줬지만, 어쨌든 그날 일 덕에 전 사원이 우리 사이를 알게 돼 결혼에 골인 했답니다.”

○총무부엔 일년 중 최대 스트레스

대기업 총무팀 강 차장은 체육대회나 워크숍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매년 공을 들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소소한 것 하나만 잘못돼도 온갖 욕을 먹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제는 음식이었다. 저녁 메뉴로 바비큐와 맥주를 준비했는데, 냉장 공간이 좁아 술을 차갑게 해 놓지 못했다. 직원들은 ‘맥주가 미지근해서 술맛이 안 난다’ ‘바비큐 고기가 왜 이렇게 질기냐’ ‘총무팀이 기본적인 것도 안하고 뭐하는 거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게다가 밤에는 만취한 직원들끼리 멱살을 잡고 한판 붙는 바람에 질책이 더 쏟아졌다. 매년 사고가 날까 봐 술의 양을 제한해놓지만, 외부에서 어떻게든 술을 구해 퍼마시는 ‘술꾼’들의 ‘깽판’은 당해낼 수가 없다.

올해 워크숍은 회장 일정에 맞춰 5월로 정해놓고 2월부터 준비했는데, 갑작스런 회장의 중국 출장으로 6월로 일정을 연기하란 지시가 내려왔다. 직원들은 장마철에 무슨 야유회냐며 아우성이고, 다른 임원들은 본인 일정을 다 바꿔야 한다며 들들 볶는다. 지난 2년간 체육대회 탓에 ‘피박’에 ‘광박’까지 써온 강 차장은 부서 이동 신청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체육대회 준비 대신 명절에 만두 빚고 전 부치라면, 죽을 때까지 부치겠어요.”

정소람/고경봉/강영연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