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공기업 한국전력의 인사 실험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간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김쌍수 사장은 청탁,로비,내부 연줄 동원으로 점철됐던 인사 관행을 송두리째 뒤엎기 위해 2급(부장) 이상 간부 1073명에 대한 '26시간30분의 비밀인사'를 단행했다.

간부 인사를 앞둔 지난 1월11일 밤 12시 권태호 인사관리팀장은 김 사장의 지시를 받고 본사 처 · 실장,지역본부장,해외사업소장 등에 임명될 54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오전 8시까지 본사로 나오십시오.어떤 보직에 임명될지는 저도 모르니 묻지 마십시오."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긴급 전화를 받은 이들은 올해 도입한 '공개경쟁 보직제'에 따라 54개 핵심 보직에 지원,7.9 대 1의 경쟁을 뚫은 간부들이다.

밤잠을 설친 이들을 김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사장은 이들에게 임명장을 준 뒤 예상치 못한 지시를 내렸다. "강당으로 가십시오.거기서 함께 일할 부하직원(팀장)들을 직접 선발하십시오.인사권을 주는 것이니 일 잘하는 사람을 알아서 뽑으면 됩니다. 인사 결과는 차후 성과와 실적으로 평가받으십시오." 오전 8시30분께 이들이 강당에 들어서자 감사실 직원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테이블에는 54개의 데스크톱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주요 보직에 누가 지원했는지를 알 수 있는 '공개경쟁 인사시스템'이 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30분까지 팀장급(본사 팀장,지방 지점장 등) 1019개 직위에 지원한 5700여명(경쟁률 5.7 대 1)의 지원서를 검토하는 인선 작업에 비지땀을 흘렸다. 결과는 16일 그대로 발표됐다.

김 사장이 이 같은 방식을 택한 이유는 인사 개혁 없이는 2만명의 직원을 둔 공룡 공기업 한전의 어떤 혁신도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회사 관계자들은 전했다.

김 사장은 지난해 10월 취임한 후 줄곧 "인사청탁은 사장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여러분도 아예 생각을 없애는 게 필요하다. 관례였다면 깨버려야 한다. 공기업의 때를 벗고 환골탈태하자"고 강조해왔다. 지난달 20,21일 열린 전국 사업소장 워크숍에서도 "인사청탁을 하면 반드시 불이익을 주겠다"며 "능력에 따른 인사가 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직 사장들도 인사청탁과의 결별을 외쳤다. 하지만 정치권과 유력 인사들의 청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심'을 무너뜨렸고,이를 막기 위한 제대로 된 인사시스템도 갖추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한전의 한 과장은 "올해 인사 결과를 보며 조금씩 희망을 갖게 됐다"며 "능력과 성과에 따른 인사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직원들 사이에서 퍼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전의 파격 인사가 소문이 나면서 다른 공기업들이 바빠졌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공기업들의 인사 관행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 5개사는 물론 군인공제회 수자원공사 등 10여개사 관계자들이 "방법을 알려 달라"며 직접 한전 인사처를 찾았다. 공개경쟁 보직제도를 도입하겠다며 문의해온 대기업도 있었다.

정부는 한전의 인사개혁이 전체 공공부문으로 퍼지도록 유도해 나갈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인력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을 통해 효율을 높이는 것만이 선진화가 아니다"며 "기관장들은 인사 문제를 포함한 과거의 불합리한 관행을 제도적으로 고쳐 나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