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2년간 몸담았던 이화여대 교단을 떠난 이어령 교수를 지난 8일 건축가 김진애 서울포럼 대표가 만났다. 이 교수는 문화부 장관으로 있을 때 경영과 문화의 접목이라는 테마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실제로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들과 함께 기업문화창달에 정열을 쏟기도 했다. 이 교수는 문화의 힘은 영원한 것이며 국가경쟁력 또한 문화경쟁력에서 비롯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는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시대로 넘어갈 때 문화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기때 나타났던 수많은 부작용과 소외계층의 양산을 막을 수 없다고 진단했다. [ 대담=김진애 서울포럼 대표 ] ------------------------------------------------------------------- -교단을 떠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동안 이분법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지식풍토에 저항해 왔다고 자부합니다만 새 천년에 절망한 나머지 일체의 공적 생활(public life)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고별 무대에서 '나는 세계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지만 한낱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이 가슴에 새삼 와닿았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향상시키기에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기업인들은 막연히 구조조정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직한 기업인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기업인들은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스스로 시장과 수요를 창조하려는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시인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독자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기업인들은 제품과 서비스로 소비자들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기업인이 세끼 밥먹자고 그렇게 고단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창조적 열정이야말로 기업인의 자양분입니다. 포드가 자동차를 대중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단순히 돈을 벌겠다고 그랬겠습니까? 포드는 유럽귀족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보다 싼 값에 가까운 이웃들도 타게 하겠다는 '열정'에서 그 유명한 컨베이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고용이 늘어나고 임금도 올라갔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노동자가 자동차 구매력을 갖춘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됐습니다. 포드가 이 모든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세상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창조적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90년대 이후 기업문화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건축 환경 디자인 등 문화산업도 산업 경쟁력의 주력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문화가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대해선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이지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명'과는 대조되는 개념이죠. 한국인들은 문화지향적입니다. 지연 혈연 학연이 중시되는 사회풍토 또한 정서와 감정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 탓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나쁘다고만 얘기할 뿐, 문명과의 접합점을 모색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문화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문명이라는 '싸늘한 세계'와 융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문화라는 자양분을 동시에 키우지 못하면 영속할 수도 없고 경쟁력을 높일 수도 없습니다. 정주영씨가 현대 특유의 기업문화를 만들지 못했다면 사우디 주베일 항만 같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를 일구었겠습니까" -IMF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치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에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누구라도 이민을 생각하게 하는 분위기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자기 신뢰'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하드웨어격인 정치 경제 사회 제도나 시스템은 별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영종도 신공항을 보십시오. 10년 전에 그만한 시설을 갖게될 것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하드웨어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소프트웨어, 즉 문화적 수용 능력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처럼 윤택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잘 사는 편입니다. 그러나 과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문화의 힘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기업들은 어떻게 문화적 경쟁력을 키울 수 있습니까. "문화의 힘은 '매력'입니다. 동시에 나눌수록 즐거움이 커지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왜 인테리어가 좋은 곳을 찾겠습니까. 매력적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제공하는 만족은 유한한 것입니다. 문화적 매력이야말로 진실로 항구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봅시다. 컴퓨터는 원래 단순한 계산기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통신과 게임 등의 콘텐츠를 만나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린 '엔터테인먼트'의 도구가 됐습니다. 컴퓨터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체험'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컴퓨터는 '체험을 파는'기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업들이 나아갈 길은 자명합니다. 소비자들에게 소프트 파워, 문화적 콘텐츠를 판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 기업의 미래 비전에 대해 조직원들이 성취와 체험을 나눠 갖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 양질의 기업문화로 소비자와 직원들을 즐겁게 하면 그 행복이 기업에도 돌아옵니다. 요즘 말하는 고객감동의 효과지요" -우리 사회를 흔히 2대 8 사회라고 합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고 여러 갈래로 비뚤어진 경쟁양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니 정보화니 하는 단어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2대 8사회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1대 9로 악화될 수도 있지요. 이른바 '디지털 소외계층'도 양산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사회의 5분의1만이 수혜계층이라고 해서 5분의4 위주로 사회 시스템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2대 8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선 5분의 1이 5분의 4를 도와 주고 지원해 줘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약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산적인 측면으로 녹아들어가지 않고 그저 이념적인 구호에만 그친다면 불행입니다. 우리와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을 돕는 것은 좋지만 북한 사회를 모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정부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1960년대에는 '잘 살아보자'는 프로젝트가 있었고 1980년대는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놀라울 정도로' 국가 프로젝트가 없습니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진행하는 대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정부는 행복과 체험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이 즐거움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것은 문화 인프라의 구축에서 출발합니다. 제조업은 재화가 없으면 수요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지만 문화는 돈이 없어도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국민들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정리=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 < 이어령 前교수 약력 >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1956년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60년 서울대 문리대 강사 1966~1989년 이화여대 교수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 1995년 이화여대 석좌교수 1999년 대통령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2001년 중앙일보 고문 주요 저서 : '지성의 오솔길'(1960) '장군의 수염'(1966) '이어령 전작집'(1968) '축소지향의 일본인'(1985) '문장대백과사전'(1988) '기업의 성패 그 문화가 좌우한다'(1992) '나를 찾는 술래잡기'(1995) '생각에 날개를 달자'(1997)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