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멀리 결승점이 눈앞에 보였다.

출발할때 구름처럼 많았던 경쟁자들도 주위엔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우승이구나.

아버지 제가 드디어 해냈어요.

아버지..."

우뢰와 같은 박수속에 1위로 결승점을 통과한 이봉주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뜨거운 눈물속으로 두달전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훤하게 떠올랐다.

이봉주의 이번 우승은 소속팀(코오롱)과의 불화로 인한 팀이탈,시드니올림픽에서의 부진과 국민들의 냉대,그리고 개인적으론 부친상이라는 온갖 역경을 한번에 털어내고 일궈낸 인간승리의 드라마였다.

이번 대회에 임하는 이봉주의 각오에는 비장감마저 배어 있었다.

출국전 이봉주는 이번만은 반드시 우승해 월계관을 아버지 산소에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그는 이 약속을 지켜냈다.

한국마라톤의 대들보 이봉주.

지난 93년 전국체전과 호놀룰루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그의 이름은 항상 92바르셀로나올림픽과 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잇따라 제패한 동갑내기 황영조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 대회에서 그는 1위와 불과 4초차이로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한국마라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어 98년엔 보스턴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마라톤대회의 하나로 꼽히는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7분44초의 당시 한국신기록으로 2위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이런 영광도 잠시.

99년 그는 소속팀 코오롱 및 정봉수 감독과의 갈등으로 팀을 이탈하며 방황에 빠진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나 할까.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노렸던 지난해 시드니올림픽에서 2시간17분57초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24위를 차지하며 선수생활중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레이스도중 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고 심지어 ''이봉주 시대는 갔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 이봉주에겐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한때는 운동을 그만두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암으로 힘들어하는 아버지께 당당한 우승컵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이봉주는 곧바로 지난해 11월부터 충남 보령에서 후쿠오카마라톤대회(2월)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다.

마라톤선수들이 풀코스를 완주한 후 3개월은 쉬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봉주는 하루라도 빨리 재기한 모습을 국민들과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대회에서 이봉주는 2시간7분20초(2위)의 한국신기록을 작성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보스턴대회를 앞두고 훈련에 열중하던 이봉주에게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봉주에게는 실의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승컵을 아버지 산소에 바치는 일뿐이었다.

신발끈을 다시 동여맨 이봉주는 미국 뉴멕시코에서 5주간의 고지대 적응훈련을 포함해 3개월간의 지옥훈련을 묵묵히 소화했다.

51년만의 ''보스턴대첩''은 이봉주가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