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특혜비리사건 피고인 11명 모두에 대해 중형이 선고된 것은 이번
기회에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법원이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선고에 앞서 이번 사건은 단순한 형사범죄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국가경제의 위기를 초래한 국가적 대재앙이라고 전제한 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피고인들에 대한 강력한 응징으로 보상돼야
한다며 중형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재판부는 먼저 이 사건 주범격인 정태수 피고인에게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아들 정보근 회장에겐 징역3년 등 부자에게 모두
실형을 선고했다.

또 정피고인 부자에게 적용된 횡령 및 사기혐의를 모두 인정해 기업인들의
무분별한 회사자금의 개인유용과 은행대출자금의 용도변경에 제동을 걸었다.

홍인길 의원 등 정치인 4명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경제의 흐름을 왜곡시켜온
정경유착의 책임을 물어 징역 7년~3년을 선고했다.

특히 국회의원으로는 처음으로 권노갑 피고인에 대해 포괄적 뇌물수수죄를
적용해 정치인의 뇌물관행 근절의지를 공공연히 밝힌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포괄적 뇌물죄의 경우 특별한 청탁의 유무를 고려할 필요는 없으며 또 그
직무행위가 어떤 권한의 행사와 관련된 것인지 특정돼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재판부가 내린 결론이다.

재판부는 이같은 판단의 근거로 국회의원이 고유권한으로 가지고 있는
법률안 등 각종 안건의 발의 및 표결권, 본회의 안건의 토론 및 표결권,
대정부 질문권, 국정감사.조사권 등을 갖고 있어 대통령에 미치지는 못하나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대통령과는 달리 국정관여도에 한계가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포괄적
뇌물죄 적용을 둘러싸고 그간 법조계 안팎에서는 끊임없는 논란이 일었으나
이번 판결로 뚜렷한 직무관련성이 없는 광범위한 청탁에 대해서도 단죄가
이뤄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에 따라 당장 이번달 중순께 열릴 예정인 문정수 부산시장, 김상현
국민회의 의원 등 "정태수리스트"에 올라 기소된 정치인 8명에 대해서도
중형선고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재판부가 "뇌물성을 가진 돈에 정치자금의 성격이 함께
내포돼 있다 하더라도 뇌물죄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정치자금의
범위를 상당히 좁게 해석한 점도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금품수수관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로써 상급심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난 1월말 한보철강 부도사태를 계기로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한보사건은 4개월여만에
사법부의 1차적인 단죄가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를 조기에 마무리하는데 급급해 한보특혜대출의 몸통을
완전히 파헤치지 못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데다 재판과정
에서도 특혜대출에 대해 납득할 만한 진술이 나오지 않아 한보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데는 실패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이심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