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주년 기획 인터뷰-참전자의 기억③]
인민군·국군 모두 다녀온 박기영 할아버지

자유 없는 북한에 몸바치기 싫어 탈영
산속 숯가마에서 먹고 자며 도망
자유 찾아 내려와 국군 입대했지만
軍 부정부패로 '죽을 고비'
그의 머릿속엔 언제나 '고향'
6·25 참전 유공자 박기영씨(88)는 군대를 두 번 다녀왔다. 북한 인민군으로 한 번, 대한민국 국군으로 한 번.

고향이 38선 위에 있던 탓에 인민군에 먼저 들어갔다. 입대하기 싫었지만, 입대하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려는 북한 당국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 입대했다. 훈련소에 들어간 지 1주일이나 지났을까, 그는 도망쳤다. “자유도 없는 곳에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낮에 자고 밤에 걸어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족과 함께 정든 고향을 놔두고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박씨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가야 북진하면서 고향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군인이 되기 싫어 떠나온 고향인데, 고향에 가기 위해선 군인이 돼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박씨는 싸워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전쟁터에서 청력을 잃은 박씨는 보청기를 껴도 두 걸음 밖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의 바로 옆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소리치듯 질문을 이어갔다.
박기영 6.25 참전 유공자는 양쪽 귀에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정의진 기자

박기영 6.25 참전 유공자는 양쪽 귀에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정의진 기자

▷고향이 어디신가요?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리. 내 고향이에요. 평양에서 동쪽으로 25리(약 10km)밖에 안 돼. 단군의 묘(단군릉)도 있고, 탄광이 많았어요.”

▷6·25 전쟁 시작했을 때 학생이셨나요?
“학교 다니고 있었지.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어요. 나이로는 열 여덟. 그때 북한은 학교 가는 데에 나이 제한이 없었어요. 나이가 조금 늦어도 인민학교(초등학교)건 중학교건 그냥 가고픈 대로 가는 거야. 덕분에 다들 교육 수준은 높았지. 한글 모르는 놈들이 없었어. 나중에 남쪽에 와서 보니까 10명 중 3명은 글자를 모르더만.”

▷전쟁 직후 북한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미군이 워낙 폭격을 퍼부으니까 학교가 문을 닫았어요. 인민군이 승승장구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하늘에선 미군 폭탄이 수시로 떨어졌거든요. 애들 다 죽을 것 같으니까 휴교한 거겠지. 그렇다고 집에 있던 것도 아니에요. 중학생만 돼도 전부 농촌이나 공장으로 동원됐어요. 도로 깔고, 건물 짓고, 자지라니(자지레한 일) 도와주고…. 걔들(북한)은 사람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들들 볶아.”

▷학생들도 고생이 많았군요.
“일만 하면 다행이지. 휴교하고 나서 한달 정도 지났을래나, 개학해서 다시 학교에 가야 했어요. 학교에 가니까 신체검사를 하더라고. 학교에서 말하는 게, 이제 곧 낙동강만 건너면 '남조선 해방'이 완료되니까 후배가 선배님들을 도와주기 위해 전부 다 입대하라는 거에요.”

▷그때 입대하신 건가요?
“아이고, 난 산으로 도망갔어요. 중학생 100명이 있으면 30명도 넘게 도망갔을 거야. 북한 애들이 그래도 똘똘해요. 김일성 독재체제 밑에선 자유가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괜히 김일성이랑 노동당에 충성 바치다 죽으면…. 알 것 다 아는 젊은 나이에 목숨 바칠 수가 없었지.”

▷산에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당시 북한은 어느 산을 가더라도 숯 만드는 가마가 군데 군데 많았어요. 목탄으로 자동차를 굴리던 때였으니까 가마가 많을 수밖에. 그 가마 안에 낙엽 깔아놓고 잤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못 찾을 정도로 피신하기 좋아요. 동생이 나무하는 척 올라오면서 몰래 밥 놔두고 가면 가져가서 먹고 그랬지. 그런데 1주일 만에 산에서 내려왔어요.”

▷왜 내려오셨나요?
“내가 학교에도 안 나오고 도망가버리니까 아버지께서 내무소로 끌려갔다고 동생한테 들었어요. 내무소는 우리로 치면 파출소지. 그 당시에 내무소 가면 반 죽는 거야. 독재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로 내려가서 바로 인민군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어요. 내가 가겠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끌려간거지. 그게 1950년 8월 중순쯤 됐을 거에요.”

나는 다시 입대할 수밖에 없었어

인민군에 입대한 박씨는 포병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훈련소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60km가량 떨어진 평안남도 안주군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부대에서 도망쳤다. 훈련을 받기 시작한지 1주일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탈영하던 상황이 궁금합니다.
“포병은 산에서 포격 위치와 거리를 관측하는 훈련을 해요. 그날도 관측 훈련 받는다고 산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유엔군 폭격이 오면 무조건 흩어져 숨어야 해요. 뭉쳐있다가 한꺼번에 죽으면 안 되니까. 그날도 비행기 소리 듣고 훈련 받던 70명이 뿔뿔이 흩어졌지. 나는 옥수수밭에 숨어 있었는데, 저 멀리 먼저 도망가는 사람이 보이는 거에요. 나도 그때 집으로 도망갔어요. 계속 있다가는 총 잡기도 전에 폭격에 죽겠더라고.”

▷집까지 꽤나 먼 거리였을 텐데요.
“멀었지. 1주일 내내 낮에 자고 밤에 걸어서 집으로 갔어요. 도망치다 들키면 큰일 나니까. 집에 들어갈 때도 동네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몰래 들어갔어요. 갔더니 아버지 눈이 휘둥그레지시더라고. 밥 차려주시는 것만 얼른 먹고 바로 산속 숯가마로 다시 들어갔어요. 그때가 8월 말 정도 됐을 거에요.”

▷언제까지 산에서 지내셨나요?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성공하고 나서 며칠 있다가 집으로 내려왔어요. 마을에 있던 인민군이랑 내무소 사람들 다 도망갔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오래 못 갔어요.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고 있다면서 난리였거든요. 인민군이 숯가마까지 다 토벌한다고 하길래 12월 4일엔 아예 고향을 두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가족하고 같이 서울 문래동까지 내려오는 데 꼬박 9일이 걸렸어요.”

▷한국군 입대는 언제 하셨나요?
“서울 도착해서 며칠 자고 바로 들어갔어요. 12월 중순이었을 거야 아마. 한강이 얼 정도로 추웠어요.”

▷왜 피난을 오자마자 입대하셨나요?
“아니 생각해봐요. 나는 북에서 왔기 때문에 이쪽에 주소지도 없고 그냥 공중에 떠 있는 무적자(無籍者)였어요. 자원입대할 수밖에 없었지…. 서울에 처음 넘어올 때도 문래동 앞에서 피난민들 검사하는 검문소가 있었는데, 헌병이 이것저것 캐묻고는 몇월 몇일에 영등포에 모여서 입대하라고 종이에 뭘 써주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내 첫 신분증이었어요. 그 종이를 가져가면 군대에 간다고 그랬어 헌병이. 마침 나도 군대에 가야 북진해서 빨리 고향으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헌병이 말해준 날짜 맞춰서 빼지 않고 곧장 영등포경찰서로 갔어요.”

◆내부의 적(敵)

북진을 꿈꾸던 소망과 달리 박씨는 예비병력 성격인 ‘국민방위군’에 배속됐다. 1950년 12월에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병력 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민간인을 동원해 편성한 군대였다. 이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추위와 배고픔, 전염병과 싸워야 했다. 군 고위 간부의 부정부패로 보급품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51년 5월 국민방위군이 해체될 때까지 동원된 민간인 50만 명 가운데 무려 9만명 이상이 총 한발 맞지 않고 후방에서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박씨는 국민방위군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적(敵)은 내부에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민방위군 훈련은 어디서 받았나요?
“경남 김해 질내면에 있는 한 국민학교로 갔어요. 나는 그때 국민방위군이 뭔지도 몰랐어…. 당연히 전방에 가는 줄 알았는데 김해로 가더라고. 서울에서 1주일 넘도록 걸어서 갔어요. 학교가 우리 훈련소였던 셈이에요. 총은 안 주고 대나무 깎은 막대기를 줬어요. 무기가 없으니까 대나무창 휘두르는 훈련을 한 거에요.”

▷훈련 시설이 많이 열악했나 보네요.
“아휴,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모아놨는지…. 한 교실에서 100명도 넘게 자니까 잘 자리가 없었어요. 밤에 점호할 때 교관이 ‘취침!’ 외치면 동시에 탁 앉거든? 그때 늦게 앉으면 앉을 자리도 없었어요…. 앉아도 옆사람이랑 같이 쪼그려 빗대 앉아가지고 겨우 새우잠 자는 거야…. 사람 많으니까 옷에 이가 드글드글하고…. 한겨울인데 이불도 없었어요. 마른 볏짚을 묶어서 덮고 잤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네요.
“그래서 많이들 죽었어요. 1951년 2월인가 3월인가, 전염병이 돌아가지고는 우리 교실에서도 하룻밤 사이에 몇 사람씩 죽어났어요. 밤에 앓던 친구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바로 옆에서 죽어있고 그랬어…. 전쟁터도 못 가보고 그게 무슨 X죽음인지 원…. 내가 아직 잊지를 못해요.”

▷할아버지께선 괜찮으셨나요?
“나도 두어달 끙끙 앓았어요. 죽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워낙 사람이 많이 죽으니까 국민방위군 해산한다면서 집에 돌아가라고 했어요. 많이들 돌아갔지. 그런데 우리 학교에 300명 정도는 집에 안 가고 남았어요. 여러 이유로 집에 못 갈 사람은 거기밖에 있을 데가 더 있나…. 나도 거기에 남아서 치료를 받았어요. 국방부 장관이 시찰 온 이후엔 대우가 좋아지더라고. 다들 젊어서 그런지 잘 먹으니까 두어 달 있다가 대부분 회복했어요.”

◆후방에서 전방으로

김해에 남아 몸을 추스린 박씨는 1952년 11월 ‘진짜’ 국군에 입대했다. 인민군, 국민방위군에 이어 사실상 세 번째 입대였다.

▷군번 기억 나세요?
“9259060. 부산에서 기차 타고 도착한 포항 해병대사령부에서 신체검사 받으니까 군번줄 주더라고. 소속은 육군이었어요. 군번줄 받은 그날 바로 미군 배 타고 제주도로 갔어요.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서 7주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원하던 전방엔 결국 가셨나요?
“훈련 끝나고 바로 배를 타고 강원도 동해에 있는 묵호로 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춘천에 있는 제2보충대로 이동해서 훈련 조교로 일했습니다. 전투 현장에 신병 수송해주는 역할이 주된 임무였어요.”

▷전방과 후방을 쉼없이 오가셨겠습니다.
“그렇지. 그때 차 한대에 군인 50명씩 태우고 다녔는데, 수송하다가 많이 죽었어요. 운전병 운전 미숙으로 산골자락에서 떨어져도 죽고, 인민군 습격에도 맞아 죽고….”

▷전선 뒤쪽에서도 인민군 습격을 맞았나요?
“걔들도 특수부대랑 수색대가 있잖아요. 몰래 침투해 있다가 조그마한 부대 습격하는 거죠. 1953년 7월 2일인가 3일인가, 양구로 병력을 수송하다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포격을 맞았어요. 차가 전복되는 와중에 살긴 살았는데, 내 귀 밑에 파편이 박혔어…. 그 이후로 왼쪽 귀가 안 들려요.”
박기영 6.25 참전 유공자 귀 밑에 파편이 박힌 자국이 남아있다. 정의진 기자

박기영 6.25 참전 유공자 귀 밑에 파편이 박힌 자국이 남아있다. 정의진 기자

포격을 맞고 정신을 잃은 박씨는 눈을 떠보니 부산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톱만한 파편은 끝내 제거하지 못했다. 당시 의료시설이 부족해 의사가 파편을 그대로 두자고 말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휴전을 맞고 3년이 지난 후에야 지역 보건소에서 파편을 제거할 수 있었다. 파편이 제거되고 상처도 아물었지만, 청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10년 전부터는 오른쪽 귀도 안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박씨는 “나는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전쟁 이후로 매일같이 아파요. 포탄 맞아서 허리도 다치고 흉막염도 생겨서 요즘도 주기적으로 가슴쪽에 물 차는 걸 호스 넣어서 빼줘야 해요. 나라에선 한 달에 32만원밖에 안 줘. 약값도 안 돼…. 그래도 나는 지금 행복해요. 몇번이나 죽어서도 오늘까지 살았잖아요. 고향 사람들은 살아있을래나….”
박기영 6.25 전쟁 참전 유공자. 정의진 기자

박기영 6.25 전쟁 참전 유공자. 정의진 기자

박씨는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얼굴은 사진 찍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공자 모자를 쓰고, 유공자 조끼를 입고 있었다.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인터뷰-참전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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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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