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비자주외교'라는 항간의 세평을 우려, 1961년 11월 워싱턴 방문에 앞서 도쿄를 경유,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미국은 한ㆍ일 관리들을 상대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종용했으며 특히 미국은 이 과정에서 대체로 일본 입장을 지지, 우리 정부는 미국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으로 26일 공개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들은 전하고 있다. 3만 5천쪽에 달하는 한일회담 문서들을 토대로 장장 13년 8개월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한일회담 교섭 과정의 뒷얘기들을 정리해본다. ◇ 박 의장, 숙고 끝 도쿄 경유 워싱턴행 존 F.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1962년 11월12일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이던 박 의장은 하루 앞서 11일 도쿄로 날아가 이케다 수상과 전격적으로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는 교착상태에 빠진 제6차 한일회담(1961.10.20∼1964.4)의 정치적 타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양국 지도부 입장이 맞아 떨어진 것이지만 당시 정부는 일 수상 초청 형식으로 도쿄에 가는 박 의장의 방일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들이 서울과 도쿄를 빈번히 오고간 '지급전보' 등 외교문서들의 행간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박 의장의 방일은 최덕신 외무장관(월북.사망)이 '한일회담 개최 관련 행정연구' 보고서를 통해 한일 정상회담을 먼저 열어야 한다고 건의한 데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일본은 (11.14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 압력을 가할 것으로 예상한 나머지) 박 의장의 방미가 끝날 때까지 '두고 보자'는 미온적인 태도로 11월말까지 시간을 허비할 가능성이 있다. 설사 그 후에 일본과의 직접 교섭에 의해 회담이 타결돼도 미국의 압력으로 이뤄진 것으로 관측될 공산이 커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 '자주성 없는 외교'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박 의장의 도쿄 경유시 초래할 미국의 오해 등 부작용 가능성도 지적됐다. 배의환(裵義煥) 한일회담 수석대표는 11월1일 외무부장관에 보낸 전보에서 "한일회담 수석대표인 스기 미찌스께(衫道助)가 우리와 상의 없이 박 의장을 초청하는 이케다 수상 친서를 갖고 방한하려 한다. 이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배 대표는 또 "그가 서울에 가면 우리 대표단의 입장이 대단히 곤란해지고, 또 정부 훈령대로 교섭을 수행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게 될 수 있으며 차라리 대표단을 서울로 철수시키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있다"면서 '스기 특사'의 방한 문제를 정부가 신중히 고려해달라고 건의했으나 결국 묵살됐다. ◇"박 의장 약력 문의가 빗발칩니다" 1961년 9월29일 주일대사는 외무부장관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현지 신문, 통신사들이 빈번히 박정희 의장의 약력(Biological sketch)에 관해 문의하고 있는 바 조속히 박 의장의 약력서와 사진을 송부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일본 언론들이 5.16쿠데타를 통해 일약 한국의 최고 지도자로 급부상한 박 의장의 신원을 대부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외무부 본부는 주일대표부의 요청에 따라 박 의장의 약력서와 함께 사진 30장을 보내주는데 외무부에서 만든 '약력' 내용에는 '만군 중위 제대' '미 포병학교 유학' 등의 내용도 담겨 있어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vs. '제너럴 팍'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8월23일자로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친서를 보내 조속히 한일회담을 타결지을 수 있도록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달라고 촉구한다. 그런데 반 페이지 분량의 이 친서 머리 부분(Greetings란)은 '친애하는 박 장군(Dear General Park)'으로 표기돼 있어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 대신 '장군'으로 호칭한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일각에서는 이를 케네디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한 박 의장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친서 끝의 수신처 부분에는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각하(His Excellency General Chung Hee Park, Acting President)'라고 표기했다. ◇"혁명정부도 '6억불' 이하면 절대 수용 못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방미(1962.10.20∼22) 도중 박 의장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전격 방문, 이케다 수상 및 오히라 외상과 회담을 하게 된다. 김 특사는 오히라 외상과의 담판에서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 청구권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연다. 이에 앞서 박 의장은 김 부장에 하달한 8개항의 '대일 절충에 대한 훈령'(62.10.17)에서 "혁명정부라고 해도 '6억불' 이하로 하강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6억불'을 청구자금의 마지노선으로 정하도록 강력히 지시하기도.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duckhw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