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세 가지에 대한 수출 통제라는 경제보복 카드를 빼든 것이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은 모두 5000억원에도 못 미치지만 170조원이 넘는 우리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출은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이들 소재 세계시장 점유율이 70~90%여서 대체수입처 찾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경제보복조치까지 동원하며 양국이 정면충돌하는 건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이견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에 대한 일본의 행동에 동의하기 어렵다. 사법부 결정이라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적임에도 극단적 카드를 꺼낸 것은 심히 부적절하다. 하지만 일본의 과잉 대응 못지않게 비판받아야 할 것은 우리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다. 일본은 한국에 일언반구 없이 일방적으로 보복조치를 발표했다. 적대국과 전쟁을 할 때도 선전포고가 상식이라는 점에서 한국을 얼마나 무시하고 불신하는지 잘 보여준다.

문제는 한국을 이처럼 ‘만만한 국가’로 보는 일본의 몰상식과 무례를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점이다. 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은 “한국의 태도는 국제법이나 관행상 용납될 수 없다”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 전까지 한국의 역대 정부는 좌우파 가릴 것 없이 ‘징용에 대한 개별보상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게 사실이다. 그런 만큼 일본 정부의 배신감 토로에 경청의 여지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수주의적 태도로 일체의 논의를 배제하는 정부의 태도는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한국 무시와 ‘패싱’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노골적으로 이런 행태를 보여왔다. 며칠 전에는 중국 베이징에 설치된 삼성과 현대자동차 광고판 120여 개가 예고 없이 심야에 철거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지난주 ‘G20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불쑥 ‘사드 문제’ 해결을 주문한 것도 무례로 볼 수밖에 없다. 뒤늦게라도 ‘사드보복 문제’의 해결을 약속해야 할 판에 안보주권에 해당하는 사드를 다시 거론한 것은 도를 넘은 무시다. 또 한국 정부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북한조차 일개 국장이 나서서 문 대통령을 거칠게 비난하는 지경이고, 혈맹 미국에서도 ‘한국 패싱’ 현상이 잦아지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와 글로벌 규범을 등한시한 자업자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불법 판정을 받은 중국의 남중국해 점유에 대응하는 자유진영의 ‘항행의 자유’ 작전에 불참하는 등 한국은 복잡한 국제 문제에서 가치와 대의를 따르기보다 ‘눈치’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행태가 우방국의 불신을 심화시키고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약화시켜 중국과 북한으로부터도 냉대받는 악순환으로 빠져드는 상황이다. 이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만만한 나라’로는 북핵 해결도 요원하다. 이번 사태를 눈앞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집착하는 얕은 셈법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