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에선 지금 '새판짜기'가 한창이다. 당장 하나금융지주가 오늘 외환은행 인수를 위해 론스타 지분을 매입하는 주식매매계약서를 체결할 예정이고,이틀 뒤 26일에는 우리금융지주의 정부 지분 매각을 위한 입찰참여의향서(LOI) 제출이 마감된다. 매각규모가 각각 4조6000억원과 6조원을 웃돌고 지방은행 · 증권 · 자산운용 · 카드 · 선물 등 다양한 계열사들까지 딸린 초대형 빅딜이다. 정부가 곧 국책은행들인 산은금융지주와 기업은행의 민영화 계획도 내놓을 예정이고 보면 금융권 전반에 빅뱅이 뒤따를 게 분명하다.

은행들이 격동기를 맞아 미래의 생존전략을 암중모색하는 모습을 지켜 보노라면 뭔가 빠졌다는 허전함을 지우기 어렵다. 한국금융의 갈길을 제시하는 정책적 밑그림이 없는 탓이다. 민영화나 인수합병(M&A)에 나선 해당 은행들로서야 목표와 비전이 없을 리 만무하다. 정부가 비전을 제시한다고 은행들이 그대로 따라간다는 보장은 없지만,업체들의 힘만으로 금융강국으로 가기란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 비전의 부재가 아쉬운 이유다.

애초부터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대형 은행을 만들자는 '메가뱅크'가 대표적이다. 2년 전 국책은행들의 민영화가 공론화됐던 때 우리금융 · 산업은행 · 기업은행을 한데 합치자는 주장이나,얼마전 우리금융의 민영화를 놓고 KB금융지주와의 합병이 거론된 것이 그 사례다. 그렇지만 지금은 퇴색해져버린 제안이다. 거대 금융그룹은 실현 가능성이 적고 시너지를 내고 경영효율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일각의 반대여론과 "대형화보다는 경쟁력 제고가 우선"이라는 금융당국의 입장에 밀린 때문이다. 물론 당국으로선 고민이 많았을 게 틀림없다. 미국과 유럽의 대형은행 규제 흐름에 역행하고,산업자본의 은행 진출이 제한된 상황에서 메가뱅크를 만들면 민영화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판단도 했을 것이다.

정부가 은행의 대형화 대신 경영건전성 강화에 힘을 쏟았고 실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별 피해없이 금융위기를 무난히 넘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은행의 대외경쟁력이 여전히 취약한 형편인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어느 곳도 일부 계열 증권사를 빼면 아시아에서조차 현지 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고사하고 변변한 지분을 사들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금융당국이 강조한 은행의 경쟁력 제고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지 의문을 갖게 되는 이유다. 금융투자회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증권사가 62곳,자산운용사가 73곳이나 되지만 자기자본이 2조원을 넘는 업체라고 해봐야 5개사뿐이다. 고만고만한 업체들이 안방시장에서 북적대는 형국이다. 금융위기의 주범인 해외 대형은행들이 속속 정상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우리는 위험을 꺼린 나머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대형화만 이뤄지면 만사형통이 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경쟁력없는 대형화는 무의미하다. 다만 지금 한국 금융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변화가 필요하며,이를 위해선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금융업체들이 아시아로 나가 싸워 실력을 기르게 뒷받침할 수 있는 대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장차 금융에서도 삼성전자 같은 강한 기업이 나올 수 있다. 정부가 서비스산업의 개혁을 강조하고 청년들의 창업을 독려하는 마당에 금융의 도전을 돕지 않는다면 도리가 아니다.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