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회계투명성' 말 바뀐 금감원
“회계사가 현장에서 느끼는 회계투명성의 수준과 제도적 문제점이 숫자로 나타난 겁니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지난 10일 발표한 기업 회계투명성 관련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7점 척도로 평가된 국내 기업의 회계투명성 수준은 평균 4.04점에 불과했다. 4점은 ‘보통’이란 응답이며 7점에 가까울수록 높은 수준, 1점에 가까울수록 낮은 수준이다.

설문에 응한 최고경영자(CEO)들은 5.11점을 준 반면 회계사(3.25점)는 ‘보통 이하’라고 답했다. 기업은 회계법인의 ‘밥그릇’을 쥐고 있는 ‘갑’이고 감사인(회계사)은 ‘을’의 입장이라, 회계사들의 평가가 신뢰할 만하다는 얘기를 이 관계자는 에둘러 한 것이다.

이 발언은 불현듯 3개월 전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9월 초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에선 한국의 회계투명성 세계 순위가 91위로, 작년보다 16계단 떨어졌다. 당시 금융당국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으로 회계제도가 개선되고 있는데 왜 순위가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기업인 설문을 기초자료로 썼는데, 기업인들의 주관적 판단이나 감에 따라 평가가 나빠진 것”이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회계투명성 법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기업 CEO들은 ‘한국의 회계 현실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 셈”이란 평가는 점잖은 편이었다. “경제민주화로 스트레스가 많아지자, WEF 설문에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점수를 낮게 준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당시엔 기업인들의 평가(WEF 순위)를 금융당국에선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후 종합적인 진단을 위해 금감원이 실시한 회계투명성 설문에서 평균 점수도 좋지 않고, 회계사들의 평가가 훨씬 박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됐다. 금감원은 이에 ‘회계사들의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입장으로 180도 선회했다. ‘뭘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절하했던 기업인이 오히려 회계사보다 점수를 더 줬으니 기업인 핑계는 더 이상 댈 수 없었다. 회계감독 당국자들이 현실과 현장을 얼마나 머릿속으로 재단하고 있었는지 씁쓸하다.

장규호 증권부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