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 < 황화상사 사장 shhwang@hwangco.com > 1960년대에 COLOMBO PLAN이라는 영연방 기금이 있었다. 저개발국가의 기술자들을 영연방의 기술 선진국으로 초청해서 2년 동안 영어도 익히고 선진 기술도 배우라는 사업이었다. 한 달에 200달러씩 생활보조비도 주어서 근검절약한 사람들은 2000~3000달러 정도를 모아 전세금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나의 한 선배는 상당한 경쟁을 뚫고 인도에 갔었다. 그때 인도는 힌두스탄 기계 제작소나 타타그룹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높은 수준의 기계 장비 기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기계 설계에 경험이 있었던 그는 기술 연수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함께 하던 다른 나라의 연수생들에게 한국을 제대로 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개한 나라, 일본의 식민지, 내전으로 황폐화된 가난과 질병의 나라로 알려져 있던 한국이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온 훈련생들이 "너희들 언어가 있니?" "시인이 있니, 소설가가 있어?" 라며 더 깔보더라는 것이었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나,과학적이고 예술성 높은 한글을 아무리 설명해도 마이동풍이더라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한국의 문화와 발전상을 소개하는 영어로 된 책자를 보내 달라고 간청을 해 왔었다. 정부 간행물을 뒤지고 문화 홍보책자를 찾아보았으나 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푸른 비단 도포 입은 노인이 갓을 정중히 쓰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장죽을 물고 경운기를 몰고 있는 사진을 표지로 한 한국 소개 책자였다. 한국의 전통을 그 노인의 입성으로, 경운기가 한국 산업 발전상의 표상이었다. 마지 못해 그 책자를 선배에게 보냈으나 그것이 그의 자존심 회복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그 뒤 들은바 없다. 이십 년도 지나기 전 80년대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 중동 공사장에서 한국 건설업체들이 비싼 우리 인력 대신 인도의 고급 인력을 200달러 남짓한 낮은 월급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외국인 고용은 점점 늘어나 요즈음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외국인 기술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그들이 도맡고 있어서 그들 없이 우리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의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동안,그들은 작업에서 혹사당하며 임금을 착취당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머슴 다루듯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구촌의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와 그들의 사회를 잇는 가장 확실한 다리이며, 그들이 한국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 갔을 때, 몇백 배의 이익을 되돌려 줄 수 있는 확실한 투자 대상이다. 청도포 입고 경운기 몰던 40여년 전의 그 균형 잡히지 않은 삶을 생각하자.그때 우리에게 도움을 주던 손길을, 업신여김을 받던 일들을 생각하자.그러면 우리가 우리 이웃으로 와 있는 외국인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명백한 길이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