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집'을 쓴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개성의 모습을 '성안의 1만 가옥은 벌이 모인 것 같고,거리의 1천여 사람은 개미가 지나가는 듯하다'고 적었다. 당시엔 또 예성강가 벽란도에서 개성의 서쪽 관문인 선의문까지 민가가 잇대어 있어 비가 와도 맞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일국의 도읍지로 이처럼 번창했던 개성은 고려의 패망 후에도 크게 쇠락하지 않고 상업지로 발전했다. 벽란도를 통한 무역과 외국 사신의 빈번한 왕래와 개성상인(松商)의 등장은 개성을 조선 제일의 교역중심지로 만들었다. 전국의 지점망을 통해 국내외 인삼과 포목 거래를 독점하다시피 한 송방(松房)이 사용한 '사개송도 치부법(四介松都 置簿法)'은 서양보다 2세기 빠른 복식부기법으로도 유명하다. 서울역에서 78km,완행열차로 2시간,경의선 도라산역에서 장단 봉동 두 곳만 거치면 도착하는 곳인데도 오랜 세월 멀기만 하던 개성에서 남북이 함께 공단 착공식을 가졌다는 소식이다. 2천만평에 공업단지 8백만평과 배후도시 1천2백만평을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우선 2007년까지 1백만평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개성공단이 들어설 자리는 선죽동 동흥동 관훈동 만월동 고려동 방직동 송악동 삼봉리 등에 걸쳐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지난해 11월13일 '개성공업지구'를 선포한 데 이어 곧바로 '개성공업지구법'을 채택,1개 시와 3개 군으로 돼있던 개성직할시를 1개 시(개성시)와 2개 군(장풍군 개풍군)으로 바꾸고 판문군을 없애는 행정구역 조정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 공단 근로자들의 통근과 원활한 화물 수송을 위해 개성과 군사분계선(MDL) 사이에 '선하역'과 '판문역'을 신설하고,남한열차가 정착할 개성역도 보수한다고 발표했다. 고려시절 개성의 시전 거리엔 좌우로 길게 늘어선 행랑의 10칸마다 천막을 치고 음료를 둬 오가는 사람 누구나 마음대로 마실 수 있게 했다고 전한다. 분단 50여년 만에 남북이 함께 첫삽을 뜬 개성공단이 모쪼록 남북 화합 및 번영의 중심지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거니와 맑고 시원한 가을 바람 속에 만월대에 오를 수 있는 날도 기다려 본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