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 < 건축가 / (주)서울포럼 대표 > "거기 주차하면 안돼요" 가게 아저씨가 소리친다. 어쩐 행운인지 상점 앞에 빈 주차공간이 있어서 주차하고 내린 나에게 떨어진 말이다. "여기 주차선 있는데요" "안돼요,우리도 돈 내고 써요" "거주자 주차 표시가 분명히 없는데요" 가게 앞에서 점심 먹고 있던 다른 아저씨가 거칠게 거든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무슨 말이 많아" "이거 법으로 되는 주차예요. 주차선 없애야 한다면 구청에 요청해 보세요" 나는 법으로 나갔다. 가게 아저씨는 붉으락푸르락,"그래,양심 있으면 주차 해!"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법을 믿고 주차했다. 겁먹은 딸이 나에게 울분을 토한다. "법하고 양심하고 무슨 관계야" "우리가 저 가게 손님이었다면 저러지 않겠지?" 정말 법에 기대 살고 싶다. 법을 믿고 살고 싶다. 나라 안의 법이든 나라끼리의 법이든.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치지 않고,되도록 서로 폐를 덜 끼치며 살 수 있게 하는 최소의,그리고 최후의 보루가 '법'이다. 파업은 분명히 법으로 보장하되,불법파업은 없으면 좋겠다. 가두시위는 법으로 가능하되,그에 대한 피해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면 좋겠다. 이면도로에서 주차 못하게 해놓았으면 철저하게 위반 티켓을 떼고,주차할 수 있게 해 놓았으면 마음놓고 주차하게 됐으면 좋겠다. 그 외에도 오죽 많으랴. 남한과 북한도 서로 룰을 지켰으면 좋겠다.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으면서 '이면계약 있는 게 아니냐'와 같은 의혹이 생기게 하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막연히 믿고 하는 기대가 아니라,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 북한 사이만이 아니라 세계와도 관련되는 사안이니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믿는 것은 '법'보다는 '돈'과 '연줄'이라니,이건 사회의 기본이 안돼도 한참 안된 것이다. 아직 우리는 '근대사회'도 못된 것이다. "불행히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답니다" 실제적으로 범죄가 생기기 전까지의 각종 사기성 위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법조계 인사의 설명에 아찔해진다. 법정으로 가더라도 그 정도 불이익에는 눈 깜짝 하지 않을 정도로 '조직적 지능적 범법'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사람들과 조직이 있다는 것,우리사회에 그런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에 아뜩해진다. 사회를 지키는 데에는 '성선설'보다 '성악설'에 기초하는 것이 맞다. 한사람 한사람은 물론 선하고,그 개인 사정은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모이는 사회로 나오면 법을 어기는 반대급부가 명확해야 하고,법치 상황을 꾸준하게 지켜보는 공공의 힘이 느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불행은 '공권력(公權力)'이라는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런 단계는 분명 넘어서야 한다. 공권력이 없다면 과연 어떻게 이 복잡한 사회가 운영될 수 있으랴. '공권력은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공감대가 생기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물론 법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법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 자체를 바꾸고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문명적인 방식이 엄연히 있다. 소송,헌법소원,입법청원 등의 법적인 방식이다. 법적 분쟁이 아무리 많아지더라도 법에 기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물론 우리사회가 미국처럼 소송 천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현장에서,또 거리에서 거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보다는 법원에서 합리적으로 정리되고 국회에서 법의 효과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다. 공권력의 기반을 만드는 국회,공권력의 정당성을 점검하는 법원,공권력의 믿음성을 키우는 정부-.부디 분발하라.입법에 공정하고 입법에 신중하라.일관성을 가지고 판정에 신중하라.국민의 준법정신 부족을 탓하기 전에 믿을 수 있는 준법 공권력의 권위를 세우라.'법이 있어 그래도 기댈 데가 있다'는 사회가 될 때, 우리사회는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jinaikim@www.seoulforu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