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발의 떡국이 또 앞에 당도하니/나이를 더 해 늙어가는 것이 가련하다/
자손들의 키 큰 것이 대견하니/안방에서 하례하는 말이 별다르다"

조선조 철종때의 선비 유만공은 저서 "세시풍요"에다 설날 아침을 맞는
감회를 이렇듯 소박하게 그려 놓았다.

그런데 그가 "안방에서 하례하는 말이 별다르다"고 표현한 것은 왜일까.

우리는 요즘도 흔히 어린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으면 "많이 컸구나"라는
덕담을 한다.

함께 생활을 하는 아이에게도 이런 덕담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큰 것과 금년에 자랄 것까지를 기정사실화해서 말하는 것이
덕담의 특징이다.

유만공이 "하례하는 말이 별다르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덕담의 특색을
가리킨 말이다.

"신년의 덕담은 "이제 그렇게 되라"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됐다"고 경하함을 특색으로 한다"

일찍이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 풀이해 놓은 것처럼 덕담의 묘미는
축원내용의 기정사실화라는 데 있다.

그래야 더 적극적 격려가 된다.

"결혼하기를 바란다"거나 "승진하기를 바란다"는 것보다는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한다면서" "승진한다더군"하는 것이 옳은 덕담이라는 말이다.

풍속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어서인지 요즘은 덕담이 서로 주고 받는
"축하인사" 정도로 격하돼 버렸다.

그러나 본래 덕담은 웃어른이 연하자에게 내려주는 격려였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으면 한다.

기왕 위 아래가 덕담을 주고 받을 바에야 흔해빠진 "건강하십시오" "복많이
받으십시오"도 대상에 따라 개성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듯 싶다.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했던 경봉 스님의 덕담은 "이 세상에 와서 연극 한 번
잘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번 설날 자녀들의 세배를 받고 내려줄 독특한 덕담 하나씩은 준비해야
겠다.

또 설연휴에 세배오는 정객들이 있다면 옛날식 덕담 한마디를 던져주면
어떨지 모르겠다.

"4월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