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와서 아이에게 잔소리가 늘었다.

"이 닦아라" "밥 먹어라" "일찍 자라"에서 "뛰지 말아라"가 추가됐을
뿐이지만 나중 한가지를 아이가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위층에서 나는 소음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위층에 사는 사람들과 한번도 마주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집의 기상과 취침시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하루는 소란스러운 발짝 소리로 시작해 소란스러운 발짝 소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간간이 리듬감이 실린 어른 발짝 소리가 섞이기도 했다.

DDR라는 춤추는 기계를 설치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위층에 인터폰을 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대뜸 상대방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이들이니 뛰어다니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

자칫 이웃간에 싸움이 날 수도 있겠다 싶어 내 쪽에서 먼저 미안하다고 하고
인터폰을 끊었다.

여전히 위층 아이들은 거실과 방을 뛰어다니고 있다.

아래층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 소음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한다.

덕분에 우리집 아이는 자신이 왜 뛰어다니면 안 되는지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제는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정 뛰고 싶으면 침대로 올라간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만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차라리 잠을 자거나 열심히 책을 보는 척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눈총 또한 개의치 않는다.

보다 못해 자리를 양보하는 쪽은 나이 든 어른들이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숱하게 꾸중을 들었다.

회초리로 맞은 적도 많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잔소리로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잔소리와 매운 회초리가 지금의 나를 키웠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할 줄 안다.

다시 만나지 않을 얼굴들이지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기는 싫다.

요즘 젊은이들의 그런 성정을 인스턴트 음식과 공해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날 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