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진 < 한글과 컴퓨터 사장 >

실리콘밸리라 하면 흔히 기술 집약적 벤처기업들이 한 곳에 모여 기반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한다든지 인력수급이 원활하다든지 하는 등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실리콘밸리와 유사한 단지를
만들겠다고 나서는걸 보면 기반시설 위에 많은 기업을 입주시키면 실리콘밸리
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처음 실리콘밸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은 별로 큰 단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다지 활기찬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한 시골마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실리콘밸리를 자주 찾게 되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수많은 저녁시간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함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이러한 각계 전문가들이 아주 조직적
으로 서로를 돕게 되어 있는 환경이다.

스탠퍼드라는 지적 타워를 중심으로 벤처기업가를 도와주는 변호사 CPA 벤처
캐피털 등이 아주 가깝게 어우러져 매일 저녁시간을 함께 하면서 대화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2년을 한 직장에 있으면 아주 무능력한 사람으로 볼 정도로 이직이
잦으며, 신규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그것 또한 좋은 경력이 되어
여러 벤처캐피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우리가 1급 비밀이라고 숨기며 몇몇만이 그 정보를 독점한 채 땀을 흘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이것이 내 아이디어요!"라며 자신이 접촉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자신의
후원 세력화하는 것이다.

이런 후원세력이 힘이 있으면 있을수록,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성공은
그만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투명하게 그리고 자신의 경력을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그 환경
안에서의 생존법칙을 배워나간다.

이것은 대기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 무사안일하면
큰 탈이 없는 우리 기업환경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들을 키워줄 사람은 바로 그들 자신 밖에 없는 것이다.

주변의 도움 역시 본인의 역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가게를 하더라도 여럿이 돈을 모아 아예 쇼핑센터를 하나 사서
그 안에 차이나타운을 만든다.

그렇게 파이를 키우는 것이 각자에게 돌아올 몫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젊은 중국 친구가 창업하면 가족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창업자금을
만들어준다.

손해를 반감시키면서 이익을 나눠 갖는 지혜가 엿보인다.

지난주 실리콘밸리에서는 한국의 벤처기업가들과 재미 벤처기업가들이 한데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이제 우리도 파이를 키워 나눠갖는 방법밖에는 달리 뾰족한 생존방법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