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제당 홍보실 김민정(24)씨.

그는 이른바 이민 1.5세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지난 86년,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건너가
대학까지 그곳에서 마쳤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귀국, 올 1월에 제일제당 해외특성인력 공채 1기로
자랑스럽게 "컴백"했다.

지금 그가 맡은 업무는 국내에 상주하고 있는 30여 외신기자들에게
제일제당을 홍보하는 일.

해외에 지사나 공장이라도 세우면 곧장 달려가 현지 기자들까지 상대한다.

최근 새로운 시장으로 한창 떠오르고 있는 동남아와 동유럽지역에 대한
홍보활동은 그가 특히 신경써야 하는 업무다.

김씨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해외홍보만 전담하는 사람이 제일제당엔 없었다.

회사가 그를 뽑은 것도 그 일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임자가 없다보니 당연히 업무 인수인계조차 없었다.

비록 13세때까지 한국에서 살긴 했지만 그후 10년을 캐나다에서 보낸
그에게 처음부터 순탄한 적응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주위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걸 보여 줬다.

홍보실에 배치된 후 한달동안은 대부분의 식사를 외신기자들과 함께 했다.

외국인들조차 놀랄 정도의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회사
홍보의 첨병으로 발벗고 나섰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터넷 실력도 총동원했다.

효과는 곧 나타났다.

국내 외신기자뿐 아니라 외국 각 언론사로부터 E-mail을 통해 자료요청에서
부터 각종 편지와 서류가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제가 생각해도 전 적응 속도가 참 빠른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민갈 때도 그랬던 것처럼요"

86년 6월.

알고 있는 영어라고는 ABC 알파벳밖에 없던 초등학교 6학년생이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을 땐 마침 여름방학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4개월이나 되는 방학기간 동안 그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고, 집에 돌아와선 TV와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그냥 놀듯이 영어를 순식간에 익혔다.

거기다 외국인들을 위해 학교측이 마련한 영어보충수업 1년으로 언어의
장벽은 그에게 더이상 문제가 안됐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고 근면한 한국 학생들의 명성은 세계가 다 아는 일.

학업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졸업한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은 캐나다 최고 명문중 하나.

제일제당이 해외인력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 교환학생 자격
으로 고려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남은 학기를 마치기 위해 밴쿠버로 돌아간 이후 미국 LA에서 인터뷰를
하고 합격이 결정됐다.

당시 그는 이미 캐나다의 한 회계법인에 입사가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조국을 위해 뭔가 봉사하겠다는 따위의 거창한 이유는 없었어요. 다만
새로운 기회를 놓치기 싫었어요. 가능하면 젊을때 한국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죠. 캐나다로는 언제든지 돌아가서 일할 수 있으니까요"

"해외파"들이 모두 한국에서 잘 적응하는 건 아니다.

처음에 가졌던 기대만큼의 실망을 안고 다시 떠나는 친구들을 그도 더러
목격했다.

한국의 독특한 조직문화도 이들에게 그리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잘 이겨내고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경험이 앞으로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지금 그는 좁은 서울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있다.

< 박해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