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들어가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그는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놓아 버린다.

마음씨 착한 시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을까? 아니다.

영신은 다시 냉정해진다.

"정말 아버님께 그런 사실을 이실직고하고 여행 떠난 거야?"

"그래요. 허락을 받고 떠났어요"

"그런데 왜 장인은 나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을까?"

"그런 문제는 우리들이 성인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신사적인
매너를 지키신 거겠지요"

"그게 신사도일까? 나를 아들처럼 생각했다면 한마디쯤 무슨 언질이
있었을 것 아니야?"

"당신이 한 짓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도
구라파쪽에 오래 계셔서 말을 안 꺼냈을 가능성이 크군요. 시간이 없었다고
할까?"

아니다. 김영신의 추측으로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이혼의 문제는 그들
둘이서 결정하도록 자율에 맡기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녀는 아버지가 비정해 보이면서도 평소 자기를 아끼는 마음이 바다같이
깊고도 넓음을 아는 이상 부모들의 침묵을 오히려 현명하다고 받아들인다.

"나는 여행후에 이혼문제를 결정한다고 하고 떠났으니까요"

"내가 절대로 이혼하지 않겠다면?"

"설마 두여자와 살겠다는 배짱은 아니겠지? 그렇게 살 사람도 없겠구요.

우리는 짐승이 아니랍니다.

미스 리는 아이나 낳아주는 기계도 아니구요.

그 여자마저 놓치지 말고 정신 차려요"

"미스 리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야. 나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짐을 맡을 의사는 없어"

"그럼 왜 그 처녀에게 애를 배게 만들었어요? 사랑은 헌신이지 계산은
아니지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당신이 그렇게 저능인 줄은 몰랐어요. 인과응보도 몰라요?"

"나이 많은 부자 여편네와 오래 살았더니 바보가 되었나봐"

그는 자조의 미소를 띠며 담배를 피워 문다.

연상의 아내라는 말은 영신에게 무척 모욕적으로 들린다.

"나가서 피우세요"

그래도 모른체 하고 윤효상이 담배를 뻑뻑 빨아대자 영신이 바람을
일으키며 문을 밀고 방을 나선다.

그 순간 윤효상이 그녀를 잡아끌면서 안으로 끌어당긴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계속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에요"

"아직 우리는 부부야"

"누구 마음대로요?"

서로 팽팽히 마주 바라보는 시선에 증오의 푸른 불꽃이 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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