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는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포로를 살때에도 나이가 어려 망아지나 강아지처럼 길을 잘 들일 수 있는
것만 골랐다. 종들은 그의 주인이 시켰을 때가 아니면 남의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주인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모른다고 대답
하게 했다.

그는 종들이 제가 맡은 일만을 하거나 자거나 해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
놓았다.

"플루타르크영웅전"에 나오는 노예의 속성은 "생명있는 도구"나 "말할줄
아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노예가 그러한 규칙을 벗어나 행동하는 때는
가혹한 벌을 받게 마련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강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던 사회치고 엄격하고
가혹한 노예제도가 없었던 나라가 없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수 있다. 한국사에서도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노비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다. 고조선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를 노비로 삼았다.

삼국시대때는 전쟁포로 특정범죄자 채무자 극빈자등이 노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공.사노비제로 정착
되었다.

역사상 가장 가공스러운 노예제도는 근대 남북아메리카의 대농장경영에서
나타났다.

소위 "노예사냥"으로 붙잡힌 1,200만명의 흑인들이 신대륙으로 팔려왔다.

이 뿌리 깊은 인권말살의 가공스러운 노예제도가 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은
100년안팎의 일이다.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일찍이 노예제도가 사라졌으나 미국
에서는 1863년,브라질에서는 1888년에야 노예해방으로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었고 한국에서는 1886년 고종의 명으로,중국에서는 1909년 법률제정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제한을 받는 준노예적 상황이
상존하고 있음을 때로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와있는
네팔 근로자들이 연수장의 "비인간적 학대와 착취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탈출"하여 항의농성 중이라는 소식은 "세계화"를 지향하는 나라의 체면에
먹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진위를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준노예적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않는 외국인들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구타와 행동제한으로 다스리는 것은 1인당국민소득 1만달러를 지향하는
나라의 기업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당국의 진상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1일자).